이종영 씨는 착취를 '사회체제적 범주'로 개념으로 일으켜 세운다. 가령 경제라는 범주에는 착취의 역사적인 맥락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 -민주주의 시대라는 허울의- 합의라는 계약적 측면에서 사태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물론 계약이 역사적인 범주라는 점에서 이미 경제의 무결성이라는 신화는 어느 정도 논파 되지만, 경제라는 논리가 가진 신적인 측면은 여전히 해체되지 않고 사회를 옥죄는 체제-'경제'라는 수사 자체가 사회체제적 범주를 뜻한다. 가령 정당하게 지불해야 하는 임금-부당하게 사용자가 지급하지 않은 (잉)여분=착취라는 외연적인 환산은 내재적인 환상, 즉 지급하는 임금의 부당성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맑스의 잉여 산출법, "잉여가치=새롭게 생산된 가치-노동력 가치"에 대한 이종영 씨의 코멘트, "그러한 계산도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비교이다. A집단이 B집단보다 더 착취당하는지 아닌지를 비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비교를 통해 우리는 단시 상대적 의미에서의 과잉착취와 과소착취를 측정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종영 씨는 스콧의 '도덕경제'를 통한 착취 개념에 접근한다. (차남희 씨의 「후기 조선사회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의 농촌침투와 농민운동」에도 스콧과 팝킨에 대한 연관된 주제가 개략적으로 논의된다.) 그는 "농민이나 노동자가 그 상황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물어야만 한다"는 스콧의 논의를 끌어온다. 



 상황 정의는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정의도 내포하는데, 그것은 곧 착취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인용자 추가)



 이것은 무슨 말인가? 지불할 대가를 지급하는 가운데 "착취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그것에 기생하는 부르주아계급의 영혼마저 질식"시키는 상황을 지시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거리, 휠체어와 목발, 링거 등의 의료기구들을 동반한 그들의 -그토록 눈물겹도록 한심한- 인정투쟁(?)은 그 엄청난 뻔뻔함을 동반하면서까지 구태의연한 체계로 자리하고 있는 것인가? 특히 그는 착취의 (역사적) 현시성을 끌로드 메이야수의 구분, "『노예제의 인류학』의 한 각주에서 탈취와 착취를 구분"하는 것에서 찾는다.



 탈취는 생산관계 외부에서 생산물의 일부를 뺏아가는 것이고, 착취는 생산관계를 조직해서 그 내부로부터 잉여를 끌어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종영 씨는 여기서 수탈이라는 좀 더 엄밀성을 추구하지만, 어찌 되었건 이러한 논의적 맥락을 따라 좀 더 필립 자리피앙을 경유해 "자본주의적 노동은 노동의 객체화에서 출발한다. … 맑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핵심은 잉여가치의 생산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체계적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노동의 객체화는 노동을 '조작'으로 전환시킨다. … (그것은) 착취는 생산관계를 조직해서 그 내부로부터 잉여를 끌어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 노동이 '조작'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노동자가 더 이상 인간의 본연적 상태에 따른 자연스런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본연적인 인간적 활동을 하는 대신, 생산의 동력학적 시퀀스 속에서 설계된 동작을 반복한다.  설계된 노동은 자본가의 욕망인 더 많은 화폐를 위한 수단(으로) … 즉 노동자는 자신의 장소가 아니라 타자의 장소 속에 갇혀서 노동한다는 것이다." (전두환을 입력했을 때 수면에 가장 먼저 드러나는 연관어가 '추징금'이라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무기력하고, 그래서 낯설고, 또다시 되풀이되는 (그래서의) 무기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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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의 아마포 저고리 등식으로 자본 사회의 미적 관점을 고찰하는 논문이다. 인터넷에는 종종 '3대가 망함'이라는 제목의 여러 글들이 올라오는데, 사적 재산을 침범하고 훼손하는 일들에 대한 반응들-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김여사가 꼬라박은 또는 아이들이 멋모르고 훼손한 명차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명차들의 성능과 그 특유의 새끈함을 다루는 책자들과 글들이 넘치며, 모터쇼는 과거 신을 몸으로 체화하던 여희(麗姬)들의 사위가 어떻게 현대적으로 각색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스스럼 없는 곤경들(도로 위의 무적자로, 법적 판단보다 사적인 이해로 유일하게 가능해진 '(재산상) 안전거리')을 기꺼이 수용하며 이것을 아름답다고 치켜세운다. 세탁의 오브제가 명화라는 값어치로 등식화되는 가치는 그래서 흥미로운 주제다. 공포야말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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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젝은 어디선가 말한다. 군인이 본질적으로 나쁘지는 않다고. 이 영화는 그런 본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 곳곳엔 가득한 상품들이 즐비하다. 이른바 명품이라고 하는 것들이 영화에서 -부르주아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을 구성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속들이 봉합되지 못한 채 널브러진 -그러나 강렬하게 번쩍이는- 이미지만을 고수하는 반면, 여기에 동행해서 이어져 나가는 인물의 삶은 스크린이라는 뚫을 수 없는 거리를 고집하는 향기를 (그럼에도) 고집한다. (이깟 영화 하나가 무슨 파문을 가지겠는가?) 다만 그러함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멋진 공식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틀렸다 -어떻게 말인가: 정의는 수단을 정의롭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바보 같은 말장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핑계는 언제나 수단이 목적에 정당하지 않음을 이유로 하는 구실을 연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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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이라는 경제적 위기와 거기에 대한 월스트리트라는 공간성, 여기에 대한 미국경제학계의 주류와 비주류의 동향을 진단하는 논문이다. "몰역사적인 생산 함수와 소비 함수를 동원한 동적 최적화 모델", 즉 이윤과 이익이라는 공리성에 입각한 합리적 효율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생산에 대한 비판과 그 주변부을 그리는 비주류의 활동들을 소개한다. 주제면이야 동향에 대한 귀동냥이기 때문에 술술 읽어가면 되고, 흥미로웠던 것은 소개되는 일화 하나였다.



 미국 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한창 번져나가던 2008년 가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왜 금융 위기가 발생했고 어떤 경제학자들도 왜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는지를 공개적으로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 영국의 왕립 학술원에 소속되어 있던 주류 경제학자들은 여왕에게 '도래하는 금융 위기를 제대로 분석할 수 없었던 경제학자들의 무능력'을 자책하면서 '창의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민감성을 갖추지 못한 경제학자들의 집단사고'가 도래할 국제 금융 위기를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답을 줄 수 없다. 학문은 미묘하게 전문과 엇나간다. -그것은 함께 고민하는 힘, (논문이 강조한 표현은 아니지만) "관심의" 힘이다. 진보에 대한 불평은 언제나 손쉽다. 그것은 늘 다음과 같은 반성과 동일한데, 당장 무언가를 제시할 수 있는 현안을 마련하라는 비판 섞인 비난이다. 우린 여기서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미래는 보이는 시야가 아니라 나아가는 징후라는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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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수에 대한 사형 폐지입장을 이야기하기란 간단하다. 우선 인권을 언급하고, 세상만사가 오로지 법 관찰에 의해 완벽하게 관철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미디어에서는 사실은 범인은 따로 있거나 우발적인 사건인데 죄 없고 가난한 사회적 희생양들은 탐색하기 마련이다. 이런 그런 장면들은 대단히 효과적으로 주제를 (가령 '7번방의 선물'에서 딸을 호명하는 신체 없는 목소리 부분... 나는 여기서 웃었다가 친구들로부터 질책과 원망을 샀다) 전달하지만, 사실을 놓고 보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워 실은 부당함에 대한 헌사에 가까운 (눈이 부신 대신에) 눈물겨운 헌사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쏘우'에서 직소가 그렇지 않은가? 삶이 따분하지 않았느냐고.) 그저 게임을 원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 데드맨 워킹은 다소 따분하다. 그래서 추천한다. 이 영화는 진부하고 무책임하다. 사형수도 살리지 못하며, 피해 가족들의 상처를 충분히 소화해내지도 못한다. 수녀는 오로지 그 중간에 서서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또 아파할 뿐이다. 사형이 집행된 뒤 사형을 강고하게 원한 유가족이 사형수 장례식에 찾아온다. 같은 교인으로서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수녀라는 사람이 살인자인 그를 보며 아파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지 그녀의 믿음을 책망한다. 그리고 그녀는 대답한다: 그건 노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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