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은 탈신화를 현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 자체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28) "비극 작가들의 눈에 포착된 신화들에는 훗날 베이컨이 열렬히 목표로 삼는 '훈육의 힘'이 이미 들어 있다."(29) 그러니까 "이러한 범주들, (그러니까 계몽이라든지 신화라든지 탈신화하는 계몽이라든지)은(는) 낡은 형이상학이라는 '극장의 우상'에 머물러 있지만, 사실 형이상학의 시대에도 이미 태곳적인 힘과 본질이 남긴 유품들이었다." (그러나를 대신해 이제는) 그래서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 자체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 … 신화들은 일찍이 보고(報告)에서 출발하여 가르침이 되었던 것이다."(28)
지방 신들과 데몬들 대신에 하늘과 하늘의 위계 질서가, 씨족 사람들과 주술사의 초혼제 대신에 정교하게 등급이 매겨진 제물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노예들의 노동이 등장했다.(29)
이것은 "신 앞에서는 온전히 무릎을 꿇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30)을 의미하며, 그것은 앞에서 언급된 '훈육의 힘'(29)이다. 그리고 이 힘을 인식한다는 것은 "주체의 각성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모든 관계의 원리인 '힘'을 인정하는 것"(30)이고, 따라서 (다시 강조하듯) "이러한 '닮은 모습'에 의해 비로소 인간은, 다른 것에 '동일화'되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난공불락의 탈을 확고하게 소유하게 되는 '자기 동일성'을 획득한다. 충만된 질이 굴복하는 것은 바로 이 '정신의 동일성'과 그 파트너인 '자연의 통일성' 때문이다."(31)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이다."(23) 베이컨은 말한다. "권력과 인식은 동의어다."(23) 인식의 대상은 체계이며, 그러한 체계를 인식함으로써 얻게 되는 주체사적 구성은 (그것이 부족이든 사회이든) 체계의 인정이다.
계몽이 사물에 대해 취하는 행태는 독재자가 인간들에 대해 취하는 행태와 같다. 독재자는 인간들을 조종할 수 있는 한 인간들을 안다. 과학적인 인간은 그가 사물을 만들 수 있는 한 사물들을 안다. 이를 통해 즉자적인 사물은 인간을 위한 사물이 된다. … 즉 지배의 대상이라는 데에 그 본질이 있는 것이다.(30)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는 앞서 언급된 이 책의 핵심 주제를 파악해야 하는가?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모든 운동이 결국에 일자적이라면 "야만 상태"의 항구성은 우주에 녹아 있는 시간만큼이나 절대적인 성질을 뜻하는 것인데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응당 이렇게 다시금 물을 수 있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12)
이에 저자는 말한다. "신화는 계몽으로 넘어가며 자연은 단순한 객체의 지위로 떨어진다."(30) 이 논의를 한층 멀리에 있는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에서 끌어오자면, "모든 '탈신화화'는 희생이 아무 쓸모 없고 불필요했었다는 끊임없는 경험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그것이 "덧없는 것임이 증명되지만 동시에 희생의 원리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합리성'에 힘입어 계속 존속한다."(93-94) 자연은 인식의 영원한 항구적 대상, 묻고, 또 묻고, 또 묻는 "어떠한 한계도" 모르는 주체적 경험이다.(22) 인간은 어디서도 안주할 수 없다. 인간은 늘 신화적이다. 계몽은 어떠한 한계도 없이 시대를 도래시킨다. 그러나 도래한 시대 역시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하며, 계몽의 한갓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시"하며, "계몽은 과격해진 신화적 불안이다."(41) 그 결과
인간 내부에 있는 자연을 부인함으로써 외적 자연 지배의 목표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목표 또한 혼란스러워지고 불투명해진다. … 문명의 역사는 희생이 내면화되는 역사다. 다른 말로 하면 체념의 역사다.(95)
정복욕, 그러니까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자연의 강압을 분쇄하려는 모든 시도는 단지 더욱 깊이 자연의 강압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것이 유럽 문명이 달려온 궤도"인 것이다.(37) 저자가 언급하는 신앙을 계몽으로 대체해도 좋다면 문명은 이러한 내용을 간직한다"
'검은 마음'은 계몽의 제2천성이다. 계몽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은밀한 의식, 즉 (자연과의) 화해를 소명으로 삼지만 항상 결핍감에 시달리는 모순 의식 때문에 계몽인의 모든 성실함은 언제나 과민하고 위험한 거승로 느껴졌다. 불과 칼의 공포, (그러니까 '총과 균의 쇠적인 감각의 공포') 낭만주의 개혁과 시민 개혁은 계몽의 원리가 우연하게 과장돼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게몽 원리 자체의 실현이었다. 계몽은 언제나 계몽 자신이 만들어 갖고 싶어하는 세계사임이 드러낸다. … '계몽의 역설'은 마침내 '20세기의 신화'라는 허황된 망상으로 변질되고, '계몽의 비합리성'은 남김없이 신앙된 자들의 손가위 속에서 합리적인 장치로 만들어져 사회를 가공할 야만 상태로 몰고 간다.(47-48)
"즉 권력이 한 계급에 주어진다면, 복종은 다른 계급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 움직이지 않는 형상으로 대상화된 '전율'은 특권층의 확립된 지배를 표시한다. 이렇게 확립된 지배는 '형상적인 것'을 모두 포기하더라도 보편 개념으로 남게 된다."(49) 개인이 감당할 수 없고 자신의 경험으로는 초탈해 버린 추징이 천벌처럼 내리 꽂힌다. 파업의 이유가 아니라 파업에 대한 이유로 개인을 초탈해 버린 배상금이 천벌처럼 내려친다. 신적인 징벌은 개인사적인 신화체험을 만든다. 그들은 그 힘을 감당해낼 수 없지만, 수긍을 해야 하므로 거뜬히 할 수 있게 된다.
'사실성'만이 정의로 인정되며 인식은 사실성의 단순한 반복으로 제한되고 사유는 단순한 '동어반복'이 된다.(57)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뒤르켐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회적 연대감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와 지배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다."(50) "왜나하면 계몽은 어떤 '체계' 못지않게 전체주의적이기 때문이다."(54) "세계의 자연 지배는 사유하는 주체로부터 등을 돌리게 됨으로써 그러한 주체에 남겨진 것은, 저 영원한 동일한 '자아'-자아가 행하는 어떤 생각에도 항상 따라다니는-가 생각한다는 사실뿐 …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사실들을 만들어낸 사회적 불의는 오늘날, 심령치료사가 자기 신의 비호 아래 신성불가침이었던 것처럼,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신성시된다."(57, 59) "이로써 계몽은 신화로 돌아가지만 이러한 새로운 신화로부터 빠져나올 방도를 계몽은 결코 알지 못했다. … 희망이 없는 것은 현존재가 아니라 '지식이다."(57-59) "애미니즘이 사물을 정령화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한다."(59) "가격이 사용하는 물건의 질을 나타내주지 못하는 것처럼, 개인을 무자비하게 다그쳐대는 이러한 집단은 인간의 참된 질을 구현할 수 없다. … 인간은 어떠한 출구도 없는 이 세계가, 인간 자신을 의미하지만 인간이 아무런 통제력도 갖지 못하고 있는 전체성에 의해 불바다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그래서/그러나) 갖고 있는 것이다."(60)
우리는 이제 어째서 이 책이 『계몽 변증법』이 아닌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미세한 차이로부터 진동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