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온통 '상품-원자'로 추상화된 세계이다. '평등'은 질적 차이들이 배제된 양화된 '등가성'으로, '자유'는 이런 추상적인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으로, '주권자'는 일인일표를 가진 '선거권자'로 호명된다.
"자유! ... 평등! ... 소유! ... (그리고/그래서) 벤담!" 이 틀에서 "노동자는 이 간극, 갈등, 모순을 무의식적으로 체현한다." 그렇기에 주체는 "자본의 내적 모순에 근거하면서도 그 내부의 모순과 괴리 속에서 외부를 창출하는, 위상학적 배치의 근본적인 역전을 추구"함으로 해서 이 마개적인 상태를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있어서는 조금 생각을 달리하는데, "좌파의 이념을 많은 사람들이 '이상주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실을 창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더욱이 이상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현실은 '현행적인 것'"으로, "그것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 몸과 마음으로 '연대와 유대'를 유지하는 '코나투스적 지속성과 충실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를 최근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다음과 같은 언급을 다음의 실타래로 엮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자는 어떻게 교육되어야 하는가? 대중으로부터이다. … '생협' … '대안학교' … '생태공동체' … '지역공동체 운동' … 많은 '정통' 좌파들은 이런 실험들에 대해 냉소적이다. 그들은 이런 실험들이 현대자본주의의 어떤 내파에서 폭발해 나오는지에 대해 사유하기 이전에 그 실험들의 미숙성과 불안정성들을 꼬집어내기에 급급할 뿐이다."
많은 '정통' 대중들은 이런 실험들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자본적인 캐치프레이즈 -웰빙, 창의교육, 주말 농장, 지역 축제 정도로 호응한다. 아니면 이런 실험들이 현대자본주의의 어떤 내파에서 폭발해 나오는지에 대해 사유하기 이전에 그 실험들의 미숙성과 불안정성들에조차도 무지하다. 이런 점에서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자는 어떻게 교육되어야 하는가? 대중으로부터이다!
이것은 냉소적 차원과는 다르게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언급하는 라캉의 공식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옳다면, 이것은 두 차원을 지시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다시 이것을 재정식해야 한다. 좌파의 이념을 많은 사람들이 '이상주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실을 창출하는 것에서 말이다. 기거서 바로 언급되는 라캉의 공식을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온통 '상품-원자'로 추상화된 세계이다. '평등'은 질적 차이들이 배제된 양화된 '등가성'으로, '자유'는 이런 추상적인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으로, '주권자'는 일인일표를 가진 '선거권자'로 호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알고 있다." 무엇을? 무엇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