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를 읽어보면 대체 내가 왜 이 책을 읽고 있는 건지 생각이 들게 된다. 빌딩에 가해진 테러, 금융의 (그냥저냥한) 위기, 냉전의 해제는 분쟁의 기폭 등 오늘날 평화라는 미사여구가 얼마나 지난 세기동 안에 허위도식으로, 그러니까 2차 대전이라는 미명하에 종전을 지시하는 도구였는지를 명확히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현실이야말로 여지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절대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군림이라는 『전체주의...』는 경직된 비판적 사고, 비판하고 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비판하는 그런 인식틀을 전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된 시기, 그러니까 9·11 이전 세계에 놓고 책을 전개해 나가다 보면 그런 인상과는 판이하게 지금 역시에도 유의미한 지도를 그려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현실이야말로 안주하게 하는 주의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외양은 거부한다는 명목하에.

















 그런 의미에서 『계몽의 변증법』 역시 시대사적인 조건에서 사유할 때 -구속이 아닌- 보다 자유롭게 나래를 펼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자전한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야만적인 전쟁을 일상으로 노예를 포획하고 그것으로 살찌운 문명이란 집체를 '찬란'이라 치켜세운 지난 세기를 휴머니즘이란 투철한 반성 도구로 진보해온 현대는 어째서 "진정한 인간적 상태"를 실현하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로 실현되었는가? 비단 감독이 필요한 아우슈비츠의 노동 수용뿐만 아니라 문명이 선진한 곳(또는 하고자 하는 곳)조차에도 사생활에 대한 감시와 사찰이 (외양적으로는 지양되지만) 일상·생활화되고, 노동 현장에는 여전히 몽둥이가 (고기의 살을 다져 연육을 만들듯) 유연한 임금 정책을 만든다. 역사는 인간 권리와 그 장전에 대한 유구한 노력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로 비껴가는가? 두 저자는 이 문제의 실마리를 계몽으로부터 찾는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계몽의 프로그램은 세계의 '탈마법화'였다. 계몽은 '신화'를 해체하고 '지식'에 의해 상상력을 붕괴시키려 한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21)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저자는 베이컨을 지목한다. 그는 인쇄기, 대포, 나침반을 언급하며 이것들이 한낱 "소 뒷걸음치다가 건진 것들"이지만 "하나는 학문에 있어서, 다른 하나는 전쟁에서, 또 다른 하나는 재정, 무역 그리고 항해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 것"(21-22)이라며, 이는 곧 "인간의 우월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식'에 있는 것"(22)을 뜻한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지식을 구성하는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는 말로만 자연을 지배할 뿐 자연의 강압 밑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연의 인도를 받아 발명에 전념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22)



 그가 단지 "염두에 두고 있는" 내용들은 사후적으로 "정확하게 알아맞혔다." 계몽은 보편으로 군림한다. 세계는 탈마법화되고, 인간은 힘을 확신한다. 힘의 확인은 "어떠한 한계도 모른다." 그리고 힘의 확인은 "지식의 핵심이다."(22) 그런데 기술의 가능은 어떤가? 바로 여기서 인류가 처한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가 돌출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이다.(23)



 이상하지 않은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것은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인데,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의 목적에는 "자연(…)을 완전히 지배"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위(同位)적으로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하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베이컨에게 빌려 이렇게 말한다. "권력과 인식은 동의어다."(23):



 근대 과학으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인간은 '의미'를 포기한다. 인간은 '개념'을 공식으로, '원인'을 규칙과 개연성으로 대체한다. … 최근의 논리학은 언어의 의미가 새겨져 있는 단어를 위조 지폐라고 비난하면서, 차라리 이러한 언어를 중립적인 계산기로 대체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24) … 베이컨에 따르면 최상의 원리와 개별 관찰에서 얻어진 명제들 사이에는 -보편성의 전도는 다르더라도- 명확한 논리적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한다.(27)



 즉,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계몽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25) 우리는 앞서 기술 가능에 대해 타전하며 이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 함의란 이러하다. 인간은 질(質)적인 사태로, 기술 가능하다. 이것은 동시에 유(類)·양(量)적인 상태를 의미하는데, 인간은 곧 기술 가능성으로 타진된다. "이러한 '닮은 모습'에 의해 비로소 인간은, 다른 것에 '동일화'되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난공불락의 탈을 확고하게 소유하게 되는 '자기 동일성'을 획득한다. 충만된 질이 굴복하는 것은 바로 이 '정신의 동일성'과 그 파트너인 '자연의 통일성' 때문이다."(31)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이다."(23) "그래서 숫자는 계몽의 경전이 되었다."(27) "시민 사회는 '동일하지 않은 것'을 '추상적인 크기'로 환산함으로써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계몽'에게는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 나아가 결국에는 '하나'로 될 수 없는 것이 '가상'(Schein)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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