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을 씻으며 - 고정국
나보다 삽을 먼저 씻는다
시린 물속에 삽날과 손을 담그고
한 해 저물도록 피와 땀을 쏟았던
흙묻은 살갗들을 어루만진다
빗나간 바늘귀
삽질한 만큼 거둔다는 약속이야 그렇지만
저기압의 일기예보때마다
뼈와 근육이 따로 뒤척이는 이부자리에
밤새도록 파고드는
물파스 냄새를 너는 안다
너는 안다
귤 농사 배추 농사 때로는
자식농사의 밭때기 거래가 끝나고
진눈깨비 농로길로 돌아온 밥상머리에
아들이 흘린 밥알을 주워먹는
아홉개 반
지문없는 손가락의 내력을
너는 안다
너는 안다
세모 때면 들판으로 눈이 내리고
추곡수매를 거절당한 노적가리마다 시름이 쌓이면
협동조합에서 지급받은 새 영농수첩에다
서울 간 혈육의 산번지 주소를 옮겨 적는다
그러나 삽이여,
녹슬기보다 부러지기를 갈구하는 삽이여
칼날보다도 휘장보다도 더 숭고한
너의 번득임을 나는 안다 나는 안다,
새해에도 거듭 새해에도
너와 내가 일궈야 할 이 땅 어드메
가슴처럼 뜨거운 영토가 기다리고 있음을
너는 안다
너는 안다,
녹슬기보다 차라리
부러지기를 갈구하는 삽이여!
눈이 왔다
올 눈다운 눈은 처음이다
겨울이다
겨울이 겨울다워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겨울이 아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땅이 녹고 씨앗이 움트고
순리대로 흘러야 무리가 없다
순리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