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을 씻으며 - 고정국

나보다 삽을 먼저 씻는다
시린 물속에 삽날과 손을 담그고
한 해 저물도록 피와 땀을 쏟았던
흙묻은 살갗들을 어루만진다
빗나간 바늘귀
삽질한 만큼 거둔다는 약속이야 그렇지만
저기압의 일기예보때마다
뼈와 근육이 따로 뒤척이는 이부자리에
밤새도록 파고드는
물파스 냄새를 너는 안다
너는 안다

귤 농사 배추 농사 때로는
자식농사의 밭때기 거래가 끝나고
진눈깨비 농로길로 돌아온 밥상머리에
아들이 흘린 밥알을 주워먹는
아홉개 반
지문없는 손가락의 내력을
너는 안다
너는 안다

세모 때면 들판으로 눈이 내리고
추곡수매를 거절당한 노적가리마다 시름이 쌓이면
협동조합에서 지급받은 새 영농수첩에다
서울 간 혈육의 산번지 주소를 옮겨 적는다

그러나 삽이여,
녹슬기보다 부러지기를 갈구하는 삽이여
칼날보다도 휘장보다도 더 숭고한
너의 번득임을 나는 안다 나는 안다,
새해에도 거듭 새해에도
너와 내가 일궈야 할 이 땅 어드메
가슴처럼 뜨거운 영토가 기다리고 있음을
너는 안다
너는 안다,
녹슬기보다 차라리
부러지기를 갈구하는 삽이여!




눈이 왔다
올 눈다운 눈은 처음이다
겨울이다
겨울이 겨울다워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겨울이 아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땅이 녹고 씨앗이 움트고
순리대로 흘러야 무리가 없다
순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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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1-22 1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삽자루의 내력이 지문의 내력과 맞닿았을때....^^..

지금행복하자 2017-01-23 09:31   좋아요 0 | URL
이 시를 접할 때마다 숙연해집니다. 삶의 고단함과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cyrus 2017-01-22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대구에 눈다운 눈이 내렸습니다. 아침에 눈 떠보니까 제법 하얗게 쌓였어요. 낮에 햇볕이 쨍쨍하게 뜨니까 거의 다 녹았습니다. 이번 달 날씨야말로 겨울 날씨답습니다. 눈 다 내리고 나면 날씨가 쌀쌀합니다. 이 날은 평소보다 춥게 느껴집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7-01-23 09:29   좋아요 0 | URL
오늘은 더 춥다고 하네요. 여기는 어제도 하루종일 눈발이 왔다갔다 하더니 오늘까지도 눈이 남아있어요.. 눈놀이 하는 아이들도 보기 좋고 추워도 겨울다워서 좋아요~

단발머리 2017-01-23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이미지가 안 떠서 클릭했더니 고정국 시인의 시집이군요. 마음에 와닿는 시예요.
기억해야겠어요, 시인 고정국^^

지금행복하자 2017-01-23 09:35   좋아요 0 | URL
이미지가 안 뜨는군요~ 옛날책이라 그럴까요? 우연히 알게 된 시인데.. 읽으면서 숙연해지는 시에요.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북프리쿠키 2017-01-23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심코 힘든 일이라곤 해본적 없는 제 지문을 들여다보니 결이 살아있네요^^; 머쓱했어요.ㅎㅎ
어쩌면 삶이란게 그 누구에겐 죽음보다
힘든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지금행복하자 2017-01-24 17:43   좋아요 0 | URL
고된 노동일을 한 사람의 지문을 어떻게 따라갈까요? 메니큐어 칠해져 있는 제 손이 부끄러워질때가 가끔 있어요~~

서니데이 2017-01-26 15: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행복하자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소망하시는 일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금행복하자 2017-01-26 19:2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명절 되세요~^^ 새해 복 뜸북 받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