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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을 걷다 - 중국 800년 수도의 신비를 찾아
주융 지음, 김양수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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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나라의 도시를 만드는 데 이처럼 깊은 의미가 있었는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중국의 中이 뜻하는 것이 단순히 모든 세상에서 중국이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中이 가지고 있는 건축학적 입장은 땅은 네모지다는 생각과 그 중심의 선에 중축선이 그어지고 그에 맞춰 도시를 대칭의 모습으로 건설되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중축선을 완벽하게 지녀온 도시가 바로 북경이라니 금나라나 송나라나 도시 계획을 거울삼아 도시 중축선을 만들었고 무엇보다 중심대를 세우는 것에 가장 많은 고려를 하였다 하니 우리의 건축물도 그런 사고를 가지고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성이 만들어진 것과 중축선이 얼마나 연결되었는지를 알려주며 우리를 베이징의 거리고 달려가고픈 마음을 들게 한다.
북경을 조망하기에 좋은 경산에 위치한 만춘정은 중축선상에서는 비껴갔지만 이 자리에서 도시의 전체 윤곽과 도로의 방향을 결정하였던 심장과도 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
경산 공원 내 수황전은 명 청시대의 도성의 중축선 뿐 아니라 원나라 대도도 이곳을 통과하였다 한다. 몽골의 기마부대가 천하 통일을 이룬 후 북경이 진정 전국의 정치 중심이 되었고 여진 왕족을 몰아내고 고산이 중심이 되어 천안문 안의 간선도로를 정하였다. 하지만 점차 제왕의 성이 골격을 드러내자 명 대 이후 중축선은 옮겨 다니지 않고 도시의 중심점이 경산으로 고정되었고 풍수를 이용하여 전 왕조를 누르기 위해 만세산 이었던 전 이름대신 청대부터 경산으로 사용되었다. 사각형 도성은 앞서도 말했듯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중국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하여 반드시 성 가운데 성이 있는 城中城 형태를 띤다.
마지막 황제로 청나라 말기의 아픈 역사를 함께 겪었던 부의의 말로를 생각나게 하는 자금성은 청대 말기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지금은 중국 최대 규모의 고대 건축물로 보호받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 자금성은 천자는 하늘의 아들이고 하늘의 이름으로 인간 세상을 통치한다고 자신의 궁성을 명 청 시대에 자금성이라 하여 천제의 궁정과 대응하도록 해 놓았다.
천자를 지존으로 삼는다는 개념 속에 군체 건축의 탁월한 공간 배치를 보여주는 중국 고대 건축은 자금성이 바로 한 서열의 시각적 구현이다. 건축 설계에 있어서도 군신간의 존비 관계를 나타나고 설계자가 한 치의 오차가 있을 시는 목숨까지 잃을 정도였다니 그 놀라운 건축 체계에 존경심까지 느끼게 한다.
중앙의 성인 자금성의 중심은 태화전이며 이 곳은 중요 의식을 거행하는 곳으로 황제 제위나 황후 책립과 매년 3대 절기등 중대 행사가 있을 때만 황제가 직접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그러니 이 곳이 전체 궁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고 태화전의 중심은 황제의 옥좌이니 바로 용의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라는 논리가 잘 증명된다. 하지만 모든 부귀영화가 한낱 물거품임을 보여 주듯 청 말기의 어수선한 시대에 엄격한 제도는 권력의 쇠퇴를 맞이하여 황제만 지나다닐 수 있었던 어도를 서강 열강이 들어가게 되었다.
자금성 건축의 화려함 뒤에는 집이 국가가 된다는 관념아래 황제의 집을 계수로 삼아 그 비율로 전조와 기타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그 비율이 9:5로 음양의 구별에 따라 홀수는 양이 되고 짝수는 음을 나타낸다. 양의 가장 큰 수인 9와 한 가운데 위치한 5는 바로 제왕의 권위를 상징하는9:5의 비율인 것이다. 황금 분할 비율의 그리스의 보편적 건축 비율과 견줘 중국 고대 건축에서도 대명문과 태화전의 정원 중심과 대명문과 경산까지의 황금분할 비율이 주는 것을 통해 아름다음을 추구하였던 자연적 합리성을 보여준다.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은 명나라 때 건립되었다. 동쪽의 장안좌문과 서쪽의 장안우문, 정남쪽 대명문은 남쪽 길을 통해 상인들이 운집하였다. 왕조의 흥망성쇠와 문의 이름도 수차례 바뀌는 가운데 중화문이 바로 대명문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전통 건축은 문과 문이 서로 마주 향하는 걸 피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성안의 거리가 상당히 넓고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바깥을 볼 수 있고 이쪽 문에서 저쪽 문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오로지 제 왕만이 막힘없이 통하는 대로를 통행 할 수 있었다.
군주제가 부활되며 주계검은 중화민국의 내무 총장이 되었고 북경성을 개조시킬 권력을 갖게 된다. 솜씨 좋은 한의사처럼 가장 중요한 경혈을 통하게 하여 고대 도시에 참신한 생명력을 불어 놓았으며 독일 기술자가 내 놓은 설계도에 따라 중국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이 절충된 대전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신 중국시기를 맞이하여 양사성이 신 북경 기획도를 제작하여 구도시를 보호하고 신도시를 따로 세운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신 중국을 상징하는 천안문은 8국 연합국에 의해 열병식도 거행함으로써 망해가는 왕조의 멸시도 받았다. 제왕 통치에서 인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도 변화하였고 민국 성립후 천안문 광장은 대중에게 개방되어 중국인들의 정신적 토템이 될 정도로 중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현대의 중국과 과거의 중국 사이에서 현존하였던 고대 건축물의 기초 사상인 중축선을 따라 풍수적으로 정치적 권위까지 상징하는 중축선이 완벽하게 간직한 북경을 통해 중국을 조금 맛볼 수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도 중국 건축의 핵심인 중축선을 바꿔 놓지 못했다. 완벽하게 중국 고대 도시의 구조를 가진 북경은 중국인들에 있어 그 삶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 같다. 변해가는 세상에 있어 그 맥과 정신을 잃지 않고자 하는 중국인을 보며 역시 대단한 민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인들이 자신의 역사와 건축물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듯 다른 민족의 역사와 그 존재를 진심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 속 한 부분이라 주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베이징 올릭핌을 통해 한 번 더 도약하려는 중국인들이 중축선이 내포하는 中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