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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이다.
요즈음이야 사시사철 책읽기 좋지 않은 계절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가을만큼 “독서(讀書)의 계절”이 잘 어울리는 계절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수많은 소설들 중 어떤 장르가 가을에 잘 어울릴까? 개인적으로 즐겨 읽는 추리·스릴러 소설은 아무래도 여름이 제격이고, 아침저녁으로 옷깃이 절로 여며지는 추운 가을 날씨에는 가슴을 따뜻함으로 물들이는 감동적인 소설이나 감성이 충만한 가슴 아픈 연애 소설이 딱 어울릴 듯하다. 그래서일까? 장르소설 마니아인 나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을, 거기에 처음 만나는 작가에 대한 울렁증이 있는 내가 이름만 들어봤을 뿐 아직 만나본 적이 없었던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모음/2012년 8월)>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 이었다
시(詩) 한 구절을 연상시키는 띠지와 책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위 문구는 평소라면 손발이 오그라들었을 문구였겠지만 갈수록 깊어가는 가을과 딱 어울리는, 처음부터 눈길을 확 잡아끄는 문구였다. 다른 책들은 책 읽기 전에 출판사 홍보글과 다른 독자들의 서평, 그리고 책 앞 뒤 면의 작가의 말들부터 꼼꼼히 읽고 시작하는데, 이 책은 그런 사전 조사 없이 이 문구로 바로 시작했다. 이 가을에 어울리는 가슴 시린 로맨스 소설이겠거니 하고 말이다.
2012년 현재, 양모(養母)인 “앤”이 죽고 난 후 집을 나와 혼자 살고 있는 26세 미혼 여성인 “카밀라 포트만”에게 양부(養父)인 “에릭”이 카밀라가 쓰던 2층 방을 정리했다며 여섯 상자에 카밀라의 유년 시절 물건들을 가득 담아 보내온다. 상자들이 배달되던 날, 상자에 담겨 있던 테디 베어 인형을 보고 눈물을 흘린 뒤로 상자를 더 이상 열어보지 않고 방 한쪽 벽에 쌓아놓았다가 남자 친구 “유이치”의 권유로 상자 속 물품들을 꺼내보며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글이 출판되면서 제법 인기를 끌게 되고 뜻하지 않게 작가가 되어 버린 카밀라에게 출판사에서 의뢰가 들어온다. 생후 6개월 만에 미국으로 입양되어 온 카밀라가 모국인 한국에서의 과거를 찾아보는 논픽션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카밀라에게 한국에 대해 남은 거라고는 양모인 앤이 죽기 몇 해 전 카밀라의 친오빠라며 보내온 편지에서 경남 진남이라는 지명과 카밀라의 생모가 진남여고 재학생이었다는 내용, 그리고 함께 동봉해온 생모로 추정되는 여자의 낡은 사진 한 장 뿐이었다. 앤은 카밀라에게 편지와 사진을 주면 곁을 떠날까봐 편지를 없애버리고 사진만 남겨뒀던 것이다. 카밀라는 유이치와 함께 한국 진남으로 찾아와 진남여고를 방문해보지만 현 교장 선생님이자 카밀라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정지은”이 학교를 다녔던 1988년 선생으로 근무했던 “신혜숙” 교장은 진남여고에서 순결을 중요시하는 학교여서 재학생이 아기를 가졌던 일은 절대 없었다고 부인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수소문과 당시 엄마의 친구들, 그리고 엄마와 추문이 돌았던 선생님 - 신혜숙의 남편이기도 하다 -의 증언들을 통해 하나 둘씩 과거의 진실이 그 베일을 벗게 된다. 카밀라이자 재희가 마주하게 된 과거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앞서 말한 대로 가슴 시린 로맨스 소설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어릴 적 입양되어 이제는 성인이 된 한 여성이 자신의 과거를 찾는 과정이 전개되면서 솔직히 당황스럽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과 같은 아름답고 감성적인 시어(詩語)들이 계속 이어지고, 카밀라가 과거를 찾는 과정이 미스터리하게 전개되면서 제법 흥미가 느껴져 이내 당황스러움을 지우고 책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카밀라가 마주하게 되는 과거는 결코 간단치가 않다. 그녀의 엄마 지은은 미성년인 여고 2학년 때 카밀라를 임신한다. 그것도 자신의 친오빠와의 패륜적인 관계로 말이다. 결국 그녀는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야 만다. 카밀라는 어쩌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런 아이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과거는 밝혀지면 밝혀질 수 록 그녀의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기까지 한 그런 것이었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 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 도 있고, 나빠질 수 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다. 너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P.201.~202.
그러나 카밀라는 그런 과거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똑바로 직시한다. 엄마와 자신과 관계된 추문(醜聞)속에 감춰진 진실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남들처럼 살지 못한 과거의 점의 인생을 선의 인생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입양아”라는 삶에서 벗어나 비록 불행하고 비참하더라도 자신의 과거를 올곧이 갖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불행하다고 외면해서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자신이 온몸으로 그것을 껴안았을 때 비로소 불행은 사라지고 자신에게 온전한 과거의 삶이 주어지기 때문 말이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과거를 찾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에 짠한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다행히 점점 밝혀지는 과거의 진실은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의 추문은 거짓으로 밝혀졌고 결말에서 자신의 아버지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짧았지만 엄마와 손을 마주 잡았을 때부터 불타오르는 강렬한 사랑을 느꼈던 아버지를 말이다.
사랑이 끝난 뒤에야 나는 언제 그 사랑이 시작됐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잡고 있던 게 정말 불이라면, 그게 첫사랑의 불꽃같은 게 맞다면, 집에 도착했을 때 내 어린 심장은 완전히 불타올라 잿더미로 바뀌었으리라 - P. 314
내 나름대로 카밀라에게 있어 과거의 의미와 있는 그대로 과거를 마주하려 한 카밀라를 응원하며 읽긴 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작가가 나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메세지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입양아의 정체성 찾기인지, 아니면 불꽃같은 사랑을 하다 간 지은의 사랑인지, 아니면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서처럼 어떤 비참하고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메시지였는지 불명확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온전히 읽어내는 데 실패했다.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남겨 놓은
가끔,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소설가는 그런 식으로 신비를 체험한다. (중략)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당부처럼 작가가 쓰지 않은 이야기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 읽고 나서도 쉽게 가시지 않은 가슴 속 울림과 여운에 책을 쉬이 덮지 못하는 것이 작가가 말한 이야기 때문이라면 아직은 여지가 남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호흡을 길게 갖고 찬찬히 글자 한자 한자를 꼼꼼히 읽어볼 생각이다. 작가가 텔레파시로 계속 보내고 있는 메시지를 계속상기하면서 말이다.
가슴시린 로맨스 소설은 아니었지만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은, 감수성이 절로 예민해지는 이 계절에 참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김연수 작가, 첫 만남이었는데 나쁘지 않은 그런 느낌의 작가이다. 이야기(敍事)의 구성력은 이 책 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책 속 곳곳에 등장하는 시와 문구들은 연습장에 따로 적어두고 싶을 정도로 참 아름답고 감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작가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