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김봉석의 하드보일드 소설 탐험 1
김봉석 지음 / 예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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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讀書)를 즐겨 하다 보니 한 편 두 편 작성해서 올린 감상글(讀後感)이 어느새 500 여 편을 넘어섰다. 아직은 내 글을 읽으면 얼굴이 다 화끈거리고, 제목에 “서평(書評)”이라는 단어를 붙이기가 영 민망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책을 읽었을 당시의 재미와 감동을 복기(復棋)해보는 즐거움이 제법 쏠쏠해서 가끔씩 과거 글들을 꺼내서 읽곤 한다. 내 글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의 서평들도 즐겨 찾아 읽는데, 좀 더 잘 쓰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제대로 책을 읽었는지 하는 공부 차원에서 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감성을 견줘보고 비교해보는 재미 또한 꽤나 크기 때문이다. 하물며 내가 좋아하는 장르소설, 특히 추리소설에 대한, 그것도 전문 평론가의 서평이라면 그 재미야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 평론가이자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의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예담/2012년 8월)>은 추리소설 마니아로서, 그리고 어쭙잖지만 장르소설 위주의 “서평”을 올리고 있는 나에게는 “공부”와 “재미”,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었다.

 

작가는 들어가는 글인 “프롤로그;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초대”에서 먼저 자신이 하드보일드 세계에 입문한 과정부터 설명한다. 작가는 아동문학전집에 끼어 있던 홈즈와 뤼팽, 연이어 아가사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 동서추리문고로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하드보일드에 결정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본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를 보고나서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이 후로 점점 하드보일드에 빠져 들어 세상이 얼마나 거대하고 폭력적인 것인지,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 자신이 그 안에서 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그 하드보일드 ‘픽션’들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하드보일드의 정의와 개념,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 이 부분은 출판사 소개글이나 다른 분들 글에서 많이 소개되어 있으므로 생략한다 -, 말미에서 하드보일드는 냉정하게, 이 세상의 법칙을 알려주며, 결코 외면하지 말고, 환상에 빠지지 말고 살아가라는 충고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것이 자신이 여전히 ‘하드보일드’에 매료되어 있는 이유이고,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이며,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무자비한 세계를 미스터리를 통해 들여다보고,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라며 프롤로그를 끝맺는다. 작가의 연배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추리소설에 입문한 과정과 똑같아서 살짝 놀라기까지 했는데, 작가처럼 <대부>에 그리 경도되지 않았다는 점은 다르다고 하겠다. 내가 <대부>를 봤을 때는 세월이 흘러 “낡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주윤발”의 우수어린 눈빛과 미소, 현란한 쌍권총 액션에 넋을 놓게 만드는 “홍콩 느와르”가 대세(大勢)였기 때문이다. 시작은 같았지만 과정에서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섰다고 할까?

 

본문에 들어서면 38 편의 소설들을 5개의 챕터(Chapter)로 나눠 소개한다. 각 챕터의 제목만으로도 작가가 인지하고 있는 하드보일드 세계를 잘 보여주는데, 작가는 현실이 가히 “개 같은 세상”이라 하더라도 “외면할 수 없”으며(1장), “약해져도 좋”으니 “어떻게든 살아남아라”고 말한다(2장). 그리고 “학교는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며 “인생은, 고통에서 배우는 것에서 배우는 것”이고, (3장), “구차해도 좋다. 자신만의 길을 가라”며 살아가고 살아남는 방법을 이야기하며(4장) - 어쩌면 2장과도 일맥상통하다 -, “거대한 벽”을 만나면 싸우거나 즐기거나 혹은 피하라고 충고한다(5장). 각 챕터에는 2~3 페이지 분량으로 제목과 주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주제에 걸맞는 책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을 싣고 있다. 이 글들에는 작가가 이 세상을 얼마나 비정(非情)하게 그리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지 잘 드러나 있는데, 출판사 홍보글에서 이 책이 “서평집의 외형을 띠고 있으나,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 신랄하게 파헤치고, 잔혹한 세상에서 취해야 할 삶의 방식을 탐색하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처세서”라는 표현이 딱 제격이라 하겠다.

 

책 속에 소개하고 있는 소설들 면면을 보면 작가의 이런 시각에 걸맞게 하나같이 음습하고 어둡고 폭력적인 책들이지만 그러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갖게 하는 책들 또한 빠뜨리지 않는다. 첫 번째 챕터인 <개 같은 세상, 그래도 외면할 수 없다 : 비정한 세계를 보는 눈>에서는 “우리 이웃의 범죄와 악인의 실체”를 이야기하는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 좌파 소탕이라는 명분하에 마약을 용인했던 미국 정부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돈 윈슬로”의 <개의 힘>, 공포가 지배하던 공산주의 사회에서 발생한 아동 연쇄살인을 그린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 44>, 관계없는 타인을 향한 무차별적인 악의를 그린 “미야베 미유키”의 <이름없는 독>, 자신의 딸을 죽인 아이들에 대한 어머니의 복수를 그린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 순도 100퍼센트의 찌질이들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아웃사이더들의 유쾌하고 통쾌한 이야기를 그린 “가네시로 카즈키”의 <레볼루션 No.0>, 자신과 다른 “특별한” 존재를 말살하려는 거대 권력의 음모와 이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다카노 카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이런 책들을 소개하면서 이 세계는 다면적이고, 아름다운 동시에 비참한 곳이며, 착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것은 좋지만, 세상은 결코 당신에게 친절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조언하고 싶다고 말한다. 즉,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다가 뒤통수를 맞고 대체 왜 이런 거냐며 울부짖기보다는 애초에 세상은 더러운 곳이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자신을 추스르며 걸어가는 게 좋다는 뜻이다. 따라서 배신을 당하고, 이유 없는 악의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나동그라졌다가도, 견디고 일어설 수 있는 내공을 위해 일단은 머리로 알고, 그 다음은 세상과 부딪치면서 맷집을 기르라면서 아무리 힘든 시련도 두 번째 겪고, 세 번째 만나면 조금은 수월해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뺏어날 가능성이 크고, 최소한 아무것도 주지 않을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제노사이드>의 저자 “가네시로 카즈키”의 말을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

 

벗어나라. 바깥에서. 달리는 거다. 누구의 편도 아니고. 어떤 조직의 하수인도 아닌 독립적인 자신이 되어라. 그게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책을 읽으면서 대학시절 선배들이 세상 물정 모르고 순해 빠진 신입생들에게 혀를 끌끌 차면서 “정신 똑바로 차려!”하고 일갈(一喝)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따뜻하고 관대하지 않다고, 세상 호락호락하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칠 거라는 그런 충고 말이다.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오는 충고이고, 이런 교훈을 범죄소설인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이끌어냈다는 것이 놀랍기까지 하지만 작가의 생각에는 살짝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온갖 질병과 불운으로 가득차 있는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있는 것은 더 큰 불행이 아니라 바로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정하고 음습한 어둠만 가득 찬 세계라도 어느 한 구석에는 희망의 작은 불씨가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바로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물론 작가가 이런 희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환상에 빠져 냉정하기만 한 세상의 법칙에 외면하지 말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하드보일드 소설이 잠깐의 졸음과 미몽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중생을 깨우치는 스님들의 죽비(竹篦)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말들을 소개하다 보니 감상글이 심각(?)해졌지만 이 책, 책 속 책들의 서평들만 읽어도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특히 하드보일드 소설 입문서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제격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서두에서 말한 “공부”는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와 주제 전달, 감상과 철학을 적절하게 녹여낸 서평의 진수를 만나 한 수 배웠다는 점과 다소 낯설었던 하드보일드 소설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던 점을 들 수 있겠고, “재미”는 역시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 추리소설의 다양한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책 속의 38권의 책 들 중 읽었거나 또는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헤아려 보니 14권에 이르니 나도 “준” 마니아급은 될 것 같다. 물론 하드보일드의 상위 장르인 추리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들과 계속 출간될 추리소설들은 앞으로도 내 독서 목록과 감상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굳이 심각하게 읽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작가의 말들을 한번쯤은 상기시키며 읽으면 더욱 재미있고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추리소설은 나에게 어떤 것일까? 작가의 “나의 힘”처럼 강렬하면서도 명쾌한 단어가 언뜻 떠오르지 않는데, 그냥 “나의 최고의 즐거움(遊戱)” 라고 할까? 써놓고 보니 참 유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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