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리브
김진우 지음 / 북퀘스트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무협, 판타지, 추리, 액션, 공포 등 우리나라 장르 소설들도 이제는 대형 서점에 별도 코너를 차지할 정도로 저변(底邊)이 많이 넓어졌고, 성취와 재미 면에서도 외국 유명 소설들 못지않게 뛰어난 작품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아직 꽃들이 만발(滿發)하거나 풍성한 열매들을 수확하는 수준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우리” 읽을거리가 자꾸 많아지는 것은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팬으로써는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직 개화(開花)는 커녕 벌판에 듬성듬성 싹을 틔우는 정도에 그치는 장르가 바로 SF(Science Fiction) 소설인 것 같다. 하긴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A. 하인라인”, “아서 C.클라크” 등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SF 작가의 작품들도 유독 우리나라에서만큼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하니 장르 자체가 인기 없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SF 부흥을 위한 활동은 꾸준히 이어왔다고 하는데, 웹진이나 동아리 중심으로 신인 작가들을 꾸준히 배출해오고 있고, 십 수 년이 넘게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들도 여럿 있다고 하니 우리 SF 소설 장르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에 오랜만에 “우리” SF 소설인 <애드리브; 사.라.지.는.것.은.없.다.(김진우 저/북퀘스트/2012년 8월)>을 읽었다. 그동안 서양과 일본 SF 소설들은 여러 권 읽었는데, 우리 작품은 작년(2011년) 2월 단편집인 <브로콜린 평원의 전투> 이후 근 1년 반 만에 만난 셈이다. 이 작품을 선뜻 선택한 이유는 “공상 음악 소설”로 불릴 만큼 독특하고 기발한 소재도 좋았지만 작가가 1989년에 데뷔하여 근 20년 넘게 활동해 온 베테랑 작가였기 때문이다. 작가 이력을 보니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척박하기만 한 우리 SF 소설 분야에서 20년 넘게 작품 활동을 해왔다니, 그 내공(內攻)이 가히 완성의 경지라는 노화순청((爐火純靑)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책을 받자마자 새 작가를 만난다는 낯섦과 설렘을 함께 느끼면서 책 표지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책은 1부「1999년」과 2부 「2901년」로 구성되어 있는데,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다 특히 2부에서는 다양한 SF적 설정이 소개되어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힘들지만 주요 등장인물과 설정 정도만 간단하게 소개해보자.

 

1부의 주인공인 “사타리”는 학창시절 자신의 이모가 운영하는 피아노 교습소에 밤마다 찾아와 몰래 기타를 연습하던 한 소녀에게서 기타를 배운 후 기타의 매력에 흠뻑 빠져 기타리스트의 길에 들어섰지만 군대를 제대한 후 기타 연주를 반대하는 이모 슬하에서 벗어나 낮에는 공장 일에, 밤에는 무명의 인디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낡은 빌라 옥탑방에서 살고 있는 청년이다. 같은 또래의 천재 여무용가의 음악 반주 -자신의 스승격인 소녀도 이 여무용가의 반주를 맡았었다 - 를 맡으면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지만, 그녀가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활동을 접고 아프리카로 떠났다가 사고로 죽으면서 사랑도 허무하게 끝이 나고, 설상가상으로 그 또한 작업 중에 손가락 둘을 잃고 만다. 사실상 기타리스트의 삶도 끝나야 정상이지만,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고 더욱 활활 불타오른다. 여무용가의 아버지가 죽은 딸에 대한 속죄의 마음으로 참가할 기회를 마련해 준 음악 페스티벌에서 사타리는 밴드 멤버인 “고다우”와 함께 공연을 하지만 어디선가 무대로 날아온 새들과 난해하기만 음악 때문에 야유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온다. 친구인 고다우는 어디선가 사고를 당해 사타리를 찾아와 그의 품에서 죽고, 사타리 또한 그의 유골을 들고 여기저기 헤매다가 어느 벌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게 한다. 이렇게 천재 음악가 사타리의 음악과 삶은 제대로 빛을 발해보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일까? 아니다. 900 년 후 19만 6775년 전부터 현재까지 활동했던 음악가 4만 3250명 중에서 30세기의 인류가 선정한 10인의 음악가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는 음악의 신(神)으로 추앙받는다.

 

그로부터 900 년 후인 2901년, 여러 번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의 삼분의 이가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리고, 그런 와중에 음악이 세계 종교가 되어 버리고 음악가들이 권력을 쥐는 일련의 과정 끝에 음악을 강압하는 “연방”과 반대로 음악의 자유를 주장하는 “반연방”으로 나뉘어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또한 수많은 음악가들은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 전설의 음악인들의 음악을 직접 녹음하고, 한편에서는 음악가들이 죽음의 음악 연주 대결을 펼치는 “레퀴엠(Requiem)"을 벌이는 그런 세상이다. 그런 미래의 지구에 전 우주(宇宙)를 떠돌아 다니며 각 행성의 음악을 채집하는 신(神)적 존재가 찾아온다. 바로 900 년 전 사타리의 기타 연주를 직접 녹음하러 온 것이다. 연방의 수뇌부는 이 사실을 극비에 붙이고 어린 소녀 모습의 신적 존재에겐 사타리가 이미 먼 과거의 존재라는 것을 숨기고는 그녀가 타고 온 막강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는 괴비행체 ”해파리“를 이용해 반연방을 몰아붙인다. ”해파리“ 때문에 고전하던 반연방 수뇌부는 신적 존재를 알아내고는 과거에서 사타리의 제자였던 ”오한음“을 데려와 사타리로 속여 기타 연주를 하게 하여 음악을 녹음시켜 신적 존재와 해파리를 지구에서 떠나게 만든다. 이렇게 전쟁은 반연방의 승리로 끝나고, 음악전문잡지 “무궁동”은 창립기념 이벤트인 “30세기의 인류가 선정한 10인의 음악가” 콘서트를 연다. 1위를 차지한 사타리의 연주 동영상이 상영되면서 콘서트는 최고조에 이르는데, 이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이처럼 책은 1부에서 현대 시대의 천재 기타리스트 “사타리”의 음악과 삶을 소개하는 “음악소설”로, 2부에서는 음악이 세계를 지배하는 미래 사회를 그린 “SF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주(主) 소재인 “음악”은 이 책에서 세계 종교로 추앙받기도 하고, 음악가들이 세계를 지배하는가 하면, 음악 때문에 양 진영으로 나뉘어 지구의 헤게모니를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음악이 전 우주를 관통하는 원리이자 비밀로까지 그 개념이 무한 확장되는 작가의 상상력이 “공상 과학 소설(science fiction, SF)이 아닌 “공상 음악 소설(music fiction, MF)”이라는 출판사 소개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참 독특하고 기발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음악에 문외한이다 보니 이 책에 등장하는 음악들이 어느 정도 깊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꽤 높은 수준이라고 느껴지는 데는 그만큼 작가의 구성력과 상상력이 뛰어난 데도 있을 테고, 음악 작곡가, 기타리스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음반도 발표한 작가의 이색 경력이 잘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고 SF 설정 면에서 꽤나 충실하다. 우선 시간여행(時間旅行, Time Travel)에 대한 설정에 대해 소개해보자. 2901년 미래는 시간여행이 가능해진다. 물론 음악애호가들이 과거의 음악가들의 연주를 녹음해오는 데 주로 이용되지만 예수의 죽음이나 싯다르타 해탈의 순간도 빈번한 시간여행이 이뤄질 정도로 인기가 높은 사건이다. 그런데 이 시간여행이 자주 행해지다 보면 일종의 “타임 패러독스”라고 할 수 있는 “노이즈”도 자주 발생하는데, 자칫하다가는 시공간이 왜곡되어 미래 세계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위험 때문에 이를 통제하는 연구소를 설치하여 관리감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인물을 미래 시간대로 데려오는 것은 어떨까? 이또한 심각한 노이즈를 초래할 수 있어 금지되는데, 다만 노이즈를 최소화하는 경우, 예를 들어 죽기 직전이라던가 또는 행방불명 등으로 그 시간대에 영향이 거의 없는 경우는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미래 시간대로 넘어온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자연발화(自然發火) 해버린다. 즉 시간대를 거슬러서는 생존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이 외에도 사람이 죽어도 그 뇌(腦)를 복제하여 네트워크 상의 생명체로 다시 살 수 있다든지, 시체를 다이아몬드 - 주로 레퀴엠 연주 대결에서 패배한 음악가들이 죽으면 그 시체를 가지고 다이아몬드를 만든다. 이 다이아몬드는 음악가 생전의 명성이 높을 수 록 암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 로 만드는 등 다양한 SF 설정이 등장한다. 물론 “실현 가능성”이라는 과학적 근거는 차치하고 말이다.

 

이야기 구성과 전개 또한 꽤나 치밀하고 탁월하다. 서로 900년이나 되는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시간과 공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 연결되는 구성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1부에서 아침 특정 시간만 되면 울리는 정체불명의 노래인 “원 웨이 오어 어나더”라는 곡이나 사타리가 연주할 때면 모여드는 “유령”의 정체들, 그리고 반대편 빌라 옥상의 의문의 여인, 사타리 공연장에 등장하는 새 떼들이나 애완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사라져 버리는 기이한 현상들은 2부에서 비로소 그 정체가 밝혀지고, 1부에서 등장했던 사타리의 제자 “오한음”이 2부 말미에서 잠깐이지만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등 서로 별개일 것 같은 이야기들과 설정이 블록처럼 서로 끼어 맞춰져 거대한 이야기를 완성해내는 구성을 선보이고 있다. 어쩌면 음악 소설인 1부가 본편이고 2부는 일종의 외전(外傳) 격으로 볼 수 있겠고, 반대로 1부는 2부 이야기를 위한 설정집이고 2부에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고 볼 수 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은 1, 2부를 모두 읽었을 때야 비로소 그 가치와 재미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1부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음악 소설이지만 2부의 SF 파노라마가 펼쳐졌을 때 1부의 가치 또한 그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또한 등장인물들과 이야기 자체도 꽤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1부는 사타리라는 천재 음악가의 성장 과정이 흥미진진하고 자못 감동스럽기까지 하며, 2부 또한 헐리우드 SF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처럼 스펙터클하다. 특히 음악가들이 연주로 데스매치를 펼치는 “레퀴엠" 장면은 칼과 총이 난무하지 않고 서로 다른 음색과 선율, 연주 테크닉으로 결투를 벌인다니 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머릿 속에서 극과 극을 치닫는 선율과 함께 환희에 빠져 혼을 실어 열정을 온 몸으로 발산하는 음악가들의 연주 모습이 고스란히 그려질 정도로 시청각(視聽覺)적인 면에서 효과를 극대화하는 기가 막힌 장면이라고 하겠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호불호(好不好)는 개인에 따라 극명하게 갈릴 것 같다. 사타리가 자신의 몸을 자해하는 장면들도 그렇고, 아무리 시청각적 효과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활자로 읽게 되는 음악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며, 다소 유치하게 보일 수 도 있는 SF적 설정이나 이야기 전개 등 때문에 이 책, 대중 소설이라기보다는 음악과 SF, 둘다를 함께 좋아하는 소수 마니아들만을 위한 소설로 남을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 열광하는 나는 마니아라고 할 수 있을까? 음악적 소양이 평범에 그치고 있어 책에 등장하는 음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니 마니아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겠지만 독특하고 기발한 설정과 흥미진진한 스토리 라인, 그리고 내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작가의 상상력과 글 솜씨에 홀딱 반한 “팬(Fan)" 정도 쯤으로 해두자^^

 

 이것저것 늘어놓다 보니 감상이 너무 길어졌지만 나의 편협한 우리나라 작가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 가치와 재미 면에서 별점 만점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하고 아울러 이런 독특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담은 우리 SF 소설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며 서둘러 이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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