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아랑전
조선희 지음, 아이완 그림 / 노블마인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각 고을마다 전설(傳說)과 민담(民譚) 한 두 자락 없는 곳이 없다고 우리나라에는 참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런 이야기(Story)들을 <전설의 고향>처럼 원형(原型) 그대로 후대에 전(傳)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현대적 감각에 맞게 구성, 각색(Telling)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들도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유럽인들의 신화와 전설로 국한되었던 전승(傳乘)을 새롭게 창조해내서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이야기로 승화, 발전시킨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처럼 말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도 이런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소설, 드라마, 영화를 통해서 우리 전통 설화와 민담을 새롭게 해석하고 각색하는 시도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니 참 반가운 일이다. 그런 시도 중 단연 발군은 “콩쥐팥쥐”, “우렁각시”, “선녀와 나뭇꾼” 등 우리에게 익숙한 전래동화를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재창조해낸 “조선희” 작가의 <모던 팥쥐전(노블마인/2010년 6월)>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는지 알진 못하지만 출간 이후 앱북, 라디오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로 이식되었다고 하니 우리나라 고유의 스토리텔링의 성공 가능성을 증명한 대표적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 “조선희식 전래동화 재해석 시리즈” - 이런 시리즈 명칭이 있는 것이 아니고 멋대로 붙여 봤다^^ - 2편 격인 책을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모던 아랑전(노블마인/2012년 8월)>이 바로 그 책이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책에는 총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첫 번째 작품이자 “아랑전설”과 “장화홍련전”을 모티브로 한 <영혼을 보는 형사>를 간략하게 소개해보자. 이 단편은 1984년 처음 개봉된 이후로 10년에 한 번씩 시리즈로 제작되면서 매 편 큰 흥행을 거두었던 영화 <네가 알려준 각색> 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남자 주인공이 영화 개봉 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는 영화 속 스토리처럼 실제로 남자 주연 배우가 불가사의한 사고로 죽어 “저주받은 영화”로 알려진 영화였다. 2014년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제작이 발표되지만 모두들 저주받은 영화에 출연을 고사하자 제작사는 남자 주연 배우 공개 오디션을 개최한다. 지하철 환승역 내의 좁은 가판대에서 신문이며 주간지 같은 잡지를 팔았던, 한마디로 “하급인생”을 살았던 청년 “허중인”은 신문에 난 오디션 공고를 보고 응모하는데, 빼어난 용모 덕분에 덜컥 붙어버리고 만다. 대중은 전임 주연 배우들의 죽음을 떠올리며 그에게 동정과 공포의 이중적인 시선을 보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 촬영에 임한다. 그런데 촬영하면서 그는 기이한 경험들을 하게 되고 자신 안에 있는 또다른 존재가 자신을 대신해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이자 앞서 세 편의 영화 남자 주인공들의 연인이었고 특히 배우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여자로 알려진, 쉰 살을 넘긴 여가수 “권피아”가 그에게 접근해오고, 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푹 빠져 버린다. 영화 제작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중인에게도 운명의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과연 영화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중인은 저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영혼을 보는 형사>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두 가지 공포 코드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새로운 공포를 선보이고 있다. 먼저 이 단편에 반영된 전래동화를 살펴보면 우선 죽은 원혼(冤魂)이 매번 사또를 찾아온다는 “아랑전설”과 “장화홍련전”의 설정을 10년 마다 제작되는 영화에 깃들어 남자 주연 배우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현대식으로 변형시킨다. 여기에 작가는 여기에 혼기(婚期)가 된 처녀가 시집을 가지 못하고 죽은 것이 한이 되어 악귀가 된다는 “손각시” 전설 또한 차용(借用)하여 반영하고, 이야기의 전개와 분위기도 전래동화 특유의 애잔함을 잘 살려 내고 있는데, 작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대 괴담(怪談)으로 종종 화제가 되는 “저주받은 영화” 모티브를 결합한다. 책에서도 언급했던 영화 <폴터가이스트> 시리즈나 영화 <엑소시스트> 시리즈는 책 속 영화 <네가 알려준 각색>처럼 실제로 출연 배우들이 의문의 사고로 죽은 저주받은 영화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이처럼 과거의 전설과 현대의 괴담을 절묘하게 조합하여 전혀 새로운 기담(奇談)을 창조해낸 작가의 기가 막힌 상상력과 구성력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오게 만든다. 이 외에 다른 단편들인 <스미스의 바다를 헤맨 남자(금도끼 은도끼)>, <버들고리에 담긴 소원(심청전)>, <오소리 공주와의 하룻밤(토끼전)>, <오래된 전화(할미꽃 이야기)>, <29년 후에 만나요(북두칠성)> 들도 전래 동화적 모티브에 학교 괴담, 심야버스 괴담, 심지어 SF적 설정까지 현대적 괴담과 장르를 자유롭게 변주해내며 한 편 한 편 새로운 이야기들을 창조해냈다. 또한 전편과 마찬가지로 책 곳곳에 실려 있는 어둡고 기묘한 분위기의 “아이완”의 그림들은 이번에도 조선희 작가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이야기의 환상성과 기묘함을 한층 배가시켜 시각적인 효과도 톡톡히 거두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 책이 그림 없이 활자(텍스트)로만 구성되었다면 영 심심했을 그런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무서운 이야기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무서움의 정도를 평가한다면 어느 수준일까? 아내는 꿈자리가 사나웠을 정도로 무서웠다고 하는데, 오싹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혹시 몰라 늦은 밤에는 읽지 않고 아침과 오전 시간에만 읽었던 탓도 있지만(^^) 이 책의 공포는 서서히 물들어가는 은근한 무서움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피와 살점이 난무하고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말 그대로 나 매우 무서운 책이요 하고 대놓고 말하는 강력한 공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실망할 수 도 있겠지만 은근하면서도 등골이 서늘한, 읽고 나서 곱씹어 보면 점점 더 오싹해지는 이 책 식의 공포가 나에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고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소재와 이야기의 기발함과 독특함, 그리고 은근하고 오싹한 공포 등 모든 면에서 "제대로 만든" 공포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이처럼 책 자체가 참 재미있기도 하고, 또한 다른 나라도 아닌 바로 우리나라 작가가 쓴 책이기 때문에 별점은 만점을 준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평가이니 이 글 때문에 책을 선택해서 읽고 실망하신 분들이 혹시 있다면 이 글을 쓴 이가 우리나라 작가를 심하게 편애를 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조선희 작가가 생각하는 무서운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문구를 인용하고 이 두서없는 감상문을 마친다.

 

무서운 이야기에는 대단한 힘이 있죠. 다른 어떤 것보다 집중하게 만들거든요.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는 온 신경이 곤두섭니다. 무서운 것과 대치한 시선은 보이는 너머 어둠 속까지 살피게 되죠. 무서우니까요. 때문에 절로 오감이 밝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평소에 보지 못하고 놓친 것들이 눈에 띄게 되는 거죠.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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