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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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일본 작가를 선택하라면 좋아하는 장르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를 꼽는 분들이 가장 많을 것 하다. 하루키 관련 기사들이야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올라와 있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독서 목록에도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도쿄기담집>, <어둠의 저편>, <1Q84> - 1권만 읽고 2,3권은 책꽂이에 잠들어 있다 - , <잡문집> 등 여러 권에 이르는데, 엉뚱하지만 - 보통은 가장 좋았던 책을 꼽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 가장 난감(難堪)했던 책이라면 에세이인 <잡문집>을 꼽고 싶다. 작가와 번역가로서의 문학관과 번역관, 음악 애호가로서의 재즈론, 독서론, 인물론 등등 하루키의 30년 문학 인생과 삶을 담아낸, 하루키 팬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책이겠지만 나에게는 읽는데 꽤나 애를 먹인 그런 책이었다. 소설이 아닌 그의 생각과 삶을 만나 본다는 것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그의 생각에 쉽게 공감이 가지 않아서였기 때문이었고, 결국 <잡문집>은 하루키는 역시 소설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 책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하루키를 에세이로 만나게 되었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원제 村上ラヂオ(2)おおきなかぶ,むずかしいアボカド / 비채 / 2012년 6월)>가 바로 그 책이다. 처음 책을 받고서는 이 책도 난감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책을 훑어보니 짧은 분량의 글과 삽화가 실려 있어 부담 없이 읽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어 가벼운 마음에 책표지를 펼쳐 들었다.

 

 

이 책은 패션잡지 <앙앙>의 코너인 ‘무라카미 라디오’ 한 해분을 모은 작품이라고 한다. 하루키는 작가의 말인 “십 년 만에 돌아와서” - 10년 전에도 같은 제목으로 <앙앙>에 연재했었다고 한다 - 에서 이 책을 쓴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하루키는 장편소설 <1Q84>를 탈고했더니 어깨가 가벼워져 에세이를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소설의 재료로 준비해뒀지만 결국 소설로는 작품화되지 않은 소재들을 에세이로 풀어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본업이 소설가인 자신에게 에세이는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지만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라고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신은 어깨 힘을 빼고 비교적 편안하게 이 글을 썼으니 독자들도 그렇게 읽어달라고 당부한다.

 

 

본문에는 52편의 글들이 실려 있는데 앞서 말한 대로 매 편 3 페이지의 짤막한 글과 함께 하루키가 어떤 그림이 더해질지 매회 은근히 기다렸다는, 그것도 연재하는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는 “오하시 아유미”의 동판화(銅版畵)가 실려 있다. 글들은 영화나 책, 사물,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하루키의 짧은 단상(斷想) - 하루키는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 들인데 그의 소소하고 유쾌한 글들을 읽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그중 몇 가지만 짧게 옮겨보자.

 

 

하루키는 행사와 스피치와 파티가 영 고역이라면서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겹치기라도 하면 완전히 악몽이 돼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되도록 그런 장소에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덕분에 종종 의리없는 짓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원래 조용한 장소에서 조용히 작품을 쓰는 것이 소설가의 본업이니 그 이외의 기능과 행위는 어디까지나 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두에게 좋은 얼굴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자신 인생의 대원칙이라는 그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이고, 독자에게 최선의 얼굴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이외의 부문은 “미안합니다”라고 잘라버릴 수 밖에 없다는, 조금은 상투적(?)인 자기변명을 한다. 그래서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는다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파티란 어떤 것일까? 다 합해서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소란스럽지 않게 담소를 나누는 부담없는 파티 - 책에는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 라고 말한다.

 

 

달리는 걸 상당히 좋아해서 가끔 풀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하루키는 참가자에게 제공하는 호텔 대형사우나에 들어갔다가 사람들 전부가 거의 비슷한 체형이라 아주 진기했다고 말한다. 보통 다양한 체형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욕탕과 달리 전원이 비슷한 체형인 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시각적으로 편하지 않아 서둘러 목욕을 마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반인 여성이 “세계 슈퍼모델 워크숍”에 참가한 모델들이 가득한 대형사우나에 들어가는 것은 꽤 무서운 체험이 될거라면서 자신이 여성이라면 그런 경우만큼은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뭐 슬쩍 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여러 체형의, 여러 생김생김의, 여러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당히 섞여 적당히 느슨하게 사는 세계가 정신건강상 가장 바람직한 것이구나 싶다고 마무리한다.

 

 

본업인 소설과 절반은 취미인 번역은 어렵지 않은데, 에세이 쓰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하루키는 에세이는 본업과 취미도 아니어서 누구를 향해 어떤 스탠스로 무엇을 쓰면 좋을지 파악하기가 힘들어 대체 어떤 걸 쓰면 좋을까 하고 팔짱을 끼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긴 하지만 에세이를 쓸 때의 원칙은 있는데,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고,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으며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조건을 지키며 에세이를 연재하려고 하니 결과적으로 화제가 상당히 한정되는, 요컨대 ‘쓸데없는 이야기’에 한없이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자신이야 쓸데없는 이야기를 비교적 좋아하니 상관없지만 메시지가 없다는 비판을 받을 때면 소설처럼 툭툭 털어 내버리지 못하고 정말 그런가 싶어 반성하기도 한단다. 그러면서 옛날 미국 서부의 술집에서는 술에 취한 카우보이가 피아노 연주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전속 피아노 연주자를 피스톨로 빵 쏘아버린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 글을 독자에게 “피스톨, 갖고 있지 않으시죠”라는 애교 섞인 질문을 한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가늘게 뜨며 이렇게 물어오는 하루키의 얼굴을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내가 그의 <잡문집>을 어려워했는지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내가 읽고 싶었던 하루키의 에세이는 소설에서의 무거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볍고 유쾌한 그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고 있다지만 무겁고 난해한 주제와 공감하기 어려운 정서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 나도 하루키를 “제법” 읽어 봤다고는 하지만 알게 모르게 마음 속에서는 그를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을 테고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하루키를 만나보자는 생각에 <잡문집>을 들었지만 기대가 빗나가면서 난감하게만 느꼈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비로소 나는 부담스럽지 않은, 아니 가볍고 유머스럽기까지 한 하루키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만나고 싶었던 그의 모습이었기에 즐거움과 유쾌함을 훨씬 크게 느껴볼 수 가 있었다. 또한 이 책으로 하루키에 대한 부담감을 한결 덜었으니 그의 다른 소설 - 우선 읽다만 <1Q84)부터 - 들과 함께 <잡문집>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는 것도 이 책으로부터 얻은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쓰다 보니 <잡문집>과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두 책에 대한 감상글이 되고 말았다^^ 아뭏튼 하루키 식의 소소하면서도 유쾌한 유머와 수다를 맛보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하루키는 진지한 얼굴도 멋있지만 가벼운 미소를 짓는 얼굴도 꽤나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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