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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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망가질 정도는 아니지만 슬슬 몸에 불편한 곳들이 하나 둘씩 생기는 것을 보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그렇다면 “젊음”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 이제 막 중년에 접어든 나이인데 이런 소리하면 어르신들께서 혀를 끌끌 차실 지도 모르겠다^^ - 이 있을까? 무협소설(武俠小說)을 보면 오랫동안 수련(修練)을 하면 뼈대와 체형이 바뀌며(“반박귀진(反樸歸眞)”), 빠진 이(齒)가 다시 나고 흰머리가 검어지는 경지(“반로환동(返老還童)”)에 이른다고 하는데,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람을 실제로 본 바가 없고, 이천여 년 전에 “불로초(不老草)”을 찾아 나선 “서복(徐福)” 일행은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인 것을 보면 불로초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분명하며,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철이”가 그렇게 소원하던 “기계 몸”은 수천 년 후에나 가능할 테고 정서상 기계 몸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 어쩌면 젊음을 되찾는 방법은 아예 “없다”고 해도 되겠다. 결국 누구나 다 알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운동 열심히 하고 술·담배 안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너무 평범하고 재미가 없다. 그런데 만약 자기 몸이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젊은 사람의 몸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균형 잡힌 몸매에 누구나 다 반할 법한 미모의 완벽한 십대 청소년의 몸으로 말이다. 아마 <개그콘서트> 대사 마냥 “눈이 번쩍 귀가 쫑긋” 하는 분들이 몇몇 있을 것 같다. “리사 프라이스”의 로맨틱 스릴러 <스타터스(원제 Starters / 황금가지 / 2012년 3월)>은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상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일, 젊음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어느 미래 이야기다.

 

 

시대를 알 수 없는 어느 미래,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변해 있다. 태평양 연안국들의 전쟁으로 미국에 치명적인 생물학 폭탄이 강타하면서 백신을 맞지 못한 중장년층은 대부분 사망하고, “스타터”라 불리는 10대 청소년들과 “엔더”라 불리는 노인들만 살아남는다. 엔더들은 법과 제도를 바꿔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과학 기술에 힘입어 100 세를 훌쩍 넘게 수명을 누리는 반면, 전쟁 통에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은 길거리로 내몰려 집행관들의 눈을 피해 할렘화된 도시 외곽 폐허 속에서 근근이 살아간다. 세상 권력과 부를 독점한 엔더들 사이에 최근 비밀스럽게 유행하고 있는 유희가 있었으니, 바로 거액을 들여 젊고 건강한 스타터들의 신체를 일정 기간 빌리는, 이른바 “신체 대여”- 책에서는 몸을 빌리는 사람을 “렌터”라고, 몸을 제공하는 사람을 “기증자”라고 부른다 -를 하여 젊은 육체를 즐기는 것이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되어 7살 어린 남동생을 부양해야 했던 16세 소녀 “나(캘리 우드랜드)”는 병약한 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 그리고 동생, 친구와 편히 쉴 집을 얻기 위해 “기증자”로 나선다. 짧은 두 번의 대여를 마치고 마지막 일주일간의 세 번째 대여를 위해 수술대에 오른 “나”는 이제 동생과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잠에 빠져든다. 여느 때처럼 꿈을 꾸던 나는 깨질 듯한 갑작스런 두통 때문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런데 이곳은 자신이 잠들었던 수술대가 아니라 젊은 남녀들이 가득한 호화로운 클럽이 아닌가. 거기에 몸 또한 자신의 몸 그대로였고, 머릿 속에는 자신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 대여 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린 켈리는 모든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과연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야기는 켈리가 자신의 몸을 렌터한 엔더가 밝히는 신체 대여에 숨은 음모가 실체를 드러내면서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숨 가쁘게 전개된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기 바랍니다)

 

최근 미래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들의 공통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다고 하니, 올해 들어 읽은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그린 소설만 해도 다섯 손가락은 넘을 정도로 자주 만났던 터라, 그리고 편견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아직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로맨스 판타지” - 출판사 홍보글에는 “로맨스 스릴러”라고 되어 있는데 로맨스를 강조했다는 면에서는 장르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 소설이라니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페이지가 넘어갈 수 록 드러나는 거대한 음모(陰謀)의 실체와 그에 맞서는 주인공의 아슬아슬한 위기와 활약이 숨 가쁘게 전개되면서 눈길 돌릴 새도 없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무엇”이 나에게 그렇게 강력한 몰입감과 재미를 불러 일으켰을까? 앞서 장난스럽게 언급한 여러 “불가능한” 회춘(回春) 방법들과는 달리 이 책에서의 “신체대여” 방법이야 말로 어쩌면 미래에서 가장 실현 가능한 방법이라고 느껴지는, 즉 “신체대여”라는 흥미로운 소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에서 “스타터”들인 10대들이 자신들의 젊은 신체를 내어 놓는 데는 저마다 이유가 다르다. 전쟁으로 부모를 여의고 도심 외곽의 폐허 속에서 위험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켈리는 바로 병약한 “동생” 때문에 자신의 신체를 내어 놓는다. 그런데 켈리의 신체를 렌터한 엔더 “헬렌”의 손녀는 부족함 없이 풍족한 생활을 하지만 할머니가 성형 수술비만큼은 지원해주지 않자 반발심에 성형 수술비를 벌기 위해 신체 대여를 나서지만 그만 실종되고 만다. 이처럼 누군가는 “생존” 때문에, 누군가는 “허영심” 때문에 자신의 신체를 내놓지만 그들의 신체를 렌터하는 “엔더”들은 과연 어떤 마음에서일까? 헬렌이나 그녀를 돕는 몇몇 엔더들은 자신들의 실종된 손자, 손녀를 찾기 위해서 신체를 렌터하지만 어쩌면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고, 대부분 엔더들은 바로 “젊음”이라는 치명적일 정도로 매력적인 “유희”를 위해 기꺼이 거액의 돈을 지불한다. 그네들의 입장에서라면 수백 년의 고달픈 수련 없이, 불로초를 찾아 헤맬 필요 전혀 없이, 그리고 기계 몸의 부작용 염려 하나 없이 전신 성형을 거친 최상의 상품을 돈을 지불하고 얻을 수 있다니, 그리고 옷을 갈아입듯이 수시로 갈아 치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멋지고 신나는 일일까? 어쩌면 “젊음”에 대한 욕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열망하는 원초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돈으로 젊음을 살 수 있다니 비윤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꾸짖는 분들도 있겠지만 과연 작금의 현실은 얼마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일까? 지구 한 편에서는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붇고 있는 현실이 하루 이틀 상관의 일이 아니며, 서구권 부유층 환자들을 위해 빈민 국가들에서는 장기 밀매와 인신매매가 빈번이 일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모 기업 총수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수혈했다는 유언비어까지 있으니 작금의 현실에서 그 정도와 방법만 다를 뿐 이런 “신체 대여”와 유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 책처럼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10대들의 젊은 신체의 대여가 가능해진다면, 이 책의 엔더들처럼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나서라도, 또는 불법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젊음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켈리와 같은 자의에 의해 제공된 청소년들의 신체들 뿐만 아니라 암거래를 통해 육체를 사들이거나 또는 DNA 복제를 통해서든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신체 대여”는 책에서 설명하는 과학적 설정의 개연성이나 가능성은 차치하고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상상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미래는 이 책처럼 누군가에는 끔찍하기만 한 “디스토피아” 로, 누군가에게는 바라 마지않는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동시에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서로 상반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비단 미래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현실에서도 이런 사례는 금방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은 국가 부도 사태인 IMF 상황에서 구조조정에 급여 삭감에 고통스러웠던 국민들이 대다수였지만 일부의 누군가는 오히려 부(富)가 급격히 증가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렇게 흥미로운 소재와 빠른 이야기 전개, 스릴과 로맨스를 적절히 조화시킨 스토리 라인 등 장점이 많은 소설이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우선 신체 대여의 합법화와 영구적인 신체 대여를 가능케 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지만 주인공에 의해 무산되는데, 수용소 갇힌 켈리가 탈출하는 장면이나 음모를 꾸민 상원의원 - 물론 그도 결말에서는 손자가 인질로 잡혀 있어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가담하게 된 일이었지만 -의 반대편 상원의원을 끌어 들여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쉽고”, 동생과 친구 또한 별 탈 없이 구해내는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점 등 결말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겠다. 또한 이 모든 사건의 진정한 배후라 할 수 있는 “올드맨”의 정체와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진 않은데 속편을 염두해 둔 설정으로 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매듭지지 못하고 읽다 만 느낌이 들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글에서는 책의 주제와 의미를 쓸데없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긴 했지만 이 책, 굳이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신체 강탈”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재미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보다 거대해지고 위험해질 올드맨의 음모와 그를 막아내는 켈리의 활약이 펼쳐지는 속편이 나오기를, 그리고 영상으로도 만나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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