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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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침팬지의 DNA 구조가 98.5% 일치한다고 하니 인간이 영장류(靈長類)에서 진화(進化), 또는 인간과 영장류(靈長類)가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진화론(進化論)”은 이제는 과학적인 정설(定說)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 중에는 인간이 수중 포유류에서 분기(分岐)해서 바다나 얕은 개울에서 생활했다가 육지로 올라왔다는 “수생인류설(水生人類說)”이 있다고 하는데, 그 증거로 인간이 전신에 털이 덮여 있는 침팬지와는 달리 돌고래나 고래처럼 몸에 털이 나지 않고, 인간이 모든 동물 중 두발로 서서 걷는 이유도 물이 약간 깊은 곳에서 머리를 내밀고 호흡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유선형의 몸매에 호흡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수생 생물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화석(化石)에 의한 증거가 없어서 학계에서는 묵살당하는 “소수파” 의견이지만 처음 이 주장을 접하고 괜히 정수리나 목덜미나 고래처럼 숨구멍 - 수생 포유류에는 “아가미”가 없고 “숨구멍”이 있다 - 흔적이 있나 싶어 더듬어 보았던, 꽤나 재미있게 느껴졌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번에 “온다 리쿠”의 <달의 뒷면(원제 月の裏側 / 비채 / 2012년 4월)>을 읽고 나서 엉뚱하게도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바로 이 “수생인류설”이었다. 물론 "온다 리쿠“가 이 가설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대형 음반 회사 신인 발굴 부서 소속 프로듀서인 “쓰카자키 다몬”은 불가사의한 일들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는 “이상한” 남성이다. 다몬은 마침 큰 프로모션이 끝나고 한숨 돌리며 다음 일에 착수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던 차에 학교 은사(恩師)이자 대학 여자 후배였던 “아이코”의 아버지인 “미쿠마 교이치로”의 초대로 별 생각 없이 태평하게 후쿠오카의 유명한 물의 도시 “야나쿠라” 시에 찾아오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다몬은 수로(水路)에 인접한 집에 살고 있던 고령(高齡)의 노인(老人)들이 깜쪽 같이 실종되었다가 며칠 만에 기억이 상실한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기이(奇異)한 사건에 대하여 쿄이치로에게서 전해 듣는다. 교이치로는 이 사건들이 수로(水路)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수로에 면한 자신의 집을 버려 두고는 수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낡은 집으로 이사와 있는 상태였다. 도쿄에서 요정을 경영하다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미쿠마”는 다몬에게 이상한 소리를 한다. 오래전 노인들처럼 실종되었다가 돌아왔던 작은 아버지 내외가 생김새는 실종 전과 똑같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런 특성은 무의식 상태에서 나타나는데 사람들의 밥 먹는 속도가 정확하게 똑같다거나 무의식 중에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점들이 바로 그 예이다. 그러면서 미쿠마는 어릴적 마을 신사(神社)가 살아 있는 생명처럼 꿈틀 거리는 “수막(水膜)”에 갇혀 있던 것을 목격했던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도시 곳곳을 흐르고 있는 수로에 뭔가 이상한 존재가 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쿄이치로의 동료는 그 존재를 일본 민담에 나오는 물의 요정인 “갓파(かっぱ, 河童, 또는 가와타로(川太郎))”로 여긴다. “그것”들이 사람을 납치 - 책에서는 그것들에 의해 ‘도둑맞다’라고 표현한다 - 해서는 뭔가 다른 존재로 만들어서 돌려 보낸다는 것이다. 시내 도서관에서 미쿠마가 어릴 적 경험했던 기이한 현상을 고스란히 다시 겪게 된 다몬과 미쿠마는 “그것”의 존재를 느끼게 되고, 다몬과 미쿠마, 교이치로, 그리고 지역 신문사 국장이자 교이치로와 함께 실종자들을 인터뷰 하면서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온 “다카야스”, 이렇게 넷은 이 사건과 “그것”의 존재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에 나선다. 그런데 밤새 장맛비가 심하게 내리던 다음날 아침,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라디오와 TV는 전파를 수신할 수 없어 지지직 거리는 소음만 들려오고, 핸드폰이며 전화도 연락 두절이 되어 버린, 외부와 철저히 고립된 그런 상황 말이다. 더욱 이상한 일은 출근길에 붐벼야 할 도로에서는 자동차 한 대 찾아볼 수 없고, 사람들로 북적북적 대야 할 시내와 기차역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 찾아 볼 수 없다는 표현이 제격일 정도로 텅 비어 버린 것이다. 야나쿠라 시 전체 시민들이 한꺼번에 실종(失踪)되어 버린, 아니 사람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며 땅의 가축 등 모든 생명체가 물 속의 “그것”에 “도둑맞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종종 안개나 외계 생명체 등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 사람들이 실종된다는 이야기들은 몇 몇 공포 소설이나 SF 소설에서 접해본 흔한 소재라 할 수 있는데, “온다 리쿠”는 자신만의 감성과 이야기로 “전혀” 다른 공포를 선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선보인 전혀 다른 공포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 나는 그 키워드를 바로 “의외성”으로 요약하고 싶다.

 

 

우선 낯익고 친숙한 일상이 예기치 못하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의외성”을 들 수 있겠다. 책에서 공포의 주체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바로 “물(水)”이다. 수로가 도심 곳곳을 가로 지르는 “야나쿠라”는 “물의 도시”,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도시이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풀이 우거진 수로변을 거닐며 도심을 가로 질러 흐르는 수로의 물들을 바라보는 것과 늦은 밤과 새벽녘에 자욱하게 내려앉은 물안개를 마주하는 것은 바로 “일상”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데 하루에도 열 두 번은 넘게 마주칠 익숙한 “일상” 속에 감히 상상치도 못한 공포의 존재가 숨어 있다면, 그리고 때로는 아무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때로는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갑작스레 몰아닥치는, 아닌게 아니라 그런 물의 속성에 대해 근원(根源)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 물 속 깊은 곳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는 상상은 그 상상만으로도 공포를 한층 배가(倍加)시키는 그런 의미가 될 것이다. 온다 리쿠는 익숙한 것이 가장 공포스러운 대상이 된다는 예기치 못한 의외성이 공포의 크기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든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제대로 짚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마치 연쇄살인 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눈사람”이 상상만으로도 그렇게 끔찍하고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처럼 말이다.

 

 

그리고 은유적이면서 다소 밋밋하기까지 했던 기존 작품들의 경향을 벗어나 이번 작품에서는 보다 실제적이고 현실감 있게 구체화시킨 “의외성”을 들 수 있겠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녀의 다른 공포소설인 <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나 함께 출간된 “쓰카자키 다몬” 시리즈인 단편집 <불연속 세계>가 읽는 동안보다 다 읽고 나서 상상해보면 더 무섭다는 느낌의 은근하면서도 묘한 공포감을 선보인다면, 이 책에서는 보다 더 끔찍하고 한층 거대한,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공포를 직접 선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실종되어 버린 상황에서 야나쿠라 시에 남겨진 다몬 일행들이 도시 곳곳을 둘러보며 주인공들이 느꼈을 공포심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주인공들에 의해 하나씩 베일에 벗겨지는 공포의 실체들과 주인공들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기에 대한 치밀하고 생생한 묘사들은 자꾸만 빨라지는 페이지 넘김 속도와 그 속도 만큼이나 호흡도 가빠지게 만들고, 자꾸만 뒷 페이지를 열어 보게 만드는, 온다 리쿠 작품 중 이렇게 몰입하게 만드는 작품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최고의 몰입감과 재미를 느끼게 만든다. 이처럼 물이라는 친숙한 소재 속에 숨은 공포와 그간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의외성”이 이번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라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이 외에도 전편인 <불연속 세계>처럼 온다 리쿠가 생각하는 “공포”의 의미에 대한 문구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공포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다음 대목과 다른 이야기지만 남녀 관계에 있어 자꾸 핀트가 어긋나기만 하는 이유 - 특히 여성 작가가 남성의 입을 빌어 그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  참 신선하고 독특하다 - 에 대한 다음 설명도 꽤나 재미있다.

 

 

문득, 공포와 애정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중략).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공포는 애정을 낳는 게 정석이다. 공포를 같이 체험함으로써 사랑 에너지가 증강된다. 공포에 관해 이야기하다보면 그 반동으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사람들은 공포를 이야기함으로써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 p.148

 

 

여자는 재미있단 말이지. 내장된 벡터의 방향이 전혀 달라.

방안에 이렇게 화살표 모빌이 잔뜩 매달려 있다 쳐. 남자는 말이지. 가끔 따로 노는 녀석도 있지만 대개는 화살표가 같은 방향으로 잔뜩 매달려 있거든. 하지만 여자는 방향이 다른 화살표가 잔뜩 매달려 있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자기 화살표하고 여자 화살표의 방향을 맞추려고 하는데, 여자 화살표는 방향이 전부 같은 게 아니니까 어느새 다른 화살표하고 정면충돌 한다든 지 입체적으로 교차하고 그래. - p.146

 

 

그렇다면 맨 처음에 언급한, 뜬금없는 “수생인류설”과 이 책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작가는 인간은 물 속에서 사는 신체 그대로 갑자기 뭍에 올라온 것처럼 여겨진다고 말하는데, 바로 이 대목이 “수생인류설”을 짐작케 한다. 여기에 작가는 원래라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육지에 적응했을 텐데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올라온 이유가 바로 무서운 일, 즉 물 속에 있는 '그것'을 피해 도망쳐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왜 물 속의 “그것”은 야나쿠라 시민들을 다시 물 속으로 끌어들인 것일까? 여기서 더 나가면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만 언급하자^^

 

 

책 발간 순서로 보면 이 책이 먼저이고 <불연속 세계>가 다음이니 나는 거꾸로 읽은 셈이다. 그러나 <불연속 세계>를 먼저 가볍고 부담 없는 “애피타이저(Appetizer, 前菜料理)”로 맛보고 난 후 깊고 풍부한 맛의 메인 요리인 <달의 뒷면>을 즐기든, 아니면 메인 요리부터 맛보고 나서 그 충격과 여운이 가시기 전에 가벼운 <디저트(Dessert, 後食料理)>를 즐기든, 어떤 식으로 즐겨도 “온다 리쿠”가 차려 놓은 “공포”의 성찬을 즐기는 데는 충분할 것 같다. 그래서 연이어 만난 <쓰자자키 다몬> 시리즈 서평의 마지막은 먼저 쓴 <불연속 세계>의 서두로 마무리해야겠다. 온다 리쿠, 그동안 만나본 많은 일본 작가들 중에 작가 이름만으로 선뜻 책을 택하게 되는 몇 안 되는 작가라고 말이다. - “자기표절(自己剽竊)”이라고 비판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그냥 “수미쌍관(首尾雙關)”식 마무리라고 봐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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