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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세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3월
평점 :
그동안 만나본 많은 일본 작가들 중에 작가 이름만으로 선뜻 책을 택하게 되는 작가는 몇 명이나 될까? 관리하고 있는 책 목록을 펼쳐 한 권 한 권 헤아려 보니 “다나카 요시키”, “미야베 미유키”, “아사다 지로”, “이사카 고타로”, 그리고 지금부터 소개할 책의 저자인 “온다 리쿠(おんだ りく)”, 이렇게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이야기의 연금술사”,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 “온다 리쿠”는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된 작품이자 온전히 그녀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한 <삼월은 붉은 구렁을> 시리즈, <삼월은~> 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어서 처음에는 당황했었지만 그녀가 장르를 초월한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성장소설 <밤의 피크닉>, 읽는 동안은 몰랐지만 읽고 난 후 상상해보면 더 무섭다는 느낌이 드는 은근하면서도 묘한 느낌이 참 매력적인 공포소설 <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등 읽은 작품이 몇 권 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모두 인상이 강렬했던 작품, 즉 개인적으로 한 번도 선택에 실패하지 않은 그런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신작 출간 소식에 늘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1년 여 만에 그녀를 “쓰카자키 다몬”이라는 독특하고 색다른 느낌의 인물이 연속으로 “주연(主演)”을 맡은 두 권의 소설로 만나게 되었다. 우선 단편소설인 <불연속 세계(원제 不連續の世界/비채/2012년 3월)>부터 이야기해보자.
책은 “쓰카자키 다몬”이 겪게 되는 다섯 가지 사건을 담고 있다. 대형 음반사에서 신인가수를 발굴하는 프로듀서인 다몬은 대박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니아 팬들을 거느리는 밴드들을 잇달아 발굴한 실력 있는 기획자이다. 남자치고는 가녀린 몸집에 갸름하고 중성적인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이 남자에게는 늘 불가사의하고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따라다닌다. 마치 연쇄 살인을 불러 오는 소년 탐정 “긴다이치(金田一)” 처럼 말이다. <나무 지킴이 사내>에서는 불길한 징조인 “나무 지킴이 사내” 목격담을 다룬다. 다몬은 밤낮이 따로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평일 오후 3시, 강가 산책길을 걷는 사람들이라고는 일반적인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시간대에 산책하면서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는 곳에 있다는 게 기이하게 느껴지는, 이런 기이한 감각을 맛보고 싶어서 틈날 때마다 강변을 산책한다. 새로 데뷔할 밴드의 이름이 마뜩지 않아서 고민하던 그는 산책 길 벤치에 앉아 있던 대학 선배 “다시로”에게서 그가 요즈음 연속해서 꾸고 있다는 “이상한” 꿈 이야기와 함께 “나무 지킴이 사내(고모리오토코)”라는 단어를 듣게 된다. 그리고는 산책길 옆 놀이터에 있는 푸릇푸릇하게 우거진 느티나무 꼭대기에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갈색 기모노를 입은 해골 같은 남자가 들러붙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옆에서 그 사내를 같이 목격한 사내 아이가 이상한 말을 한다. 요새 나무지킴이 사내가 이 주변에 출몰한다고, 할아버지 말로는 나무지킴이 사내가 나오면 도쿄가 불바다가 된다고, “도쿄 대공습” 전날인 1945년 3월 9일에도 출몰했었다고. 과연 나무지킴이 사내의 정체란 무엇일까? 1990년 대 초반에 다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책에는 이 외에도 죽음을 부르는 노래 이야기인 <악마를 동정하는 노래>, 영화 촬영하는 장면을 보면 주변 사람이 죽는다는 아이돌 로커의 이야기인 <환영 시네마>, 거대한 모래구멍인 “사구(砂丘)”가 하룻밤 사이에 깜쪽같이 사라졌다 나타나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그린 <사구 피크닉>, 어느새 중년의 나이가 된 다몬 - 첫 편에서는 미혼(未婚)이었던 그가 마지막 편에서는 첫 편에 등장했던 프랑스 여인 “잔”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작품에서는 그의 아내인 잔의 실종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 과 그의 중년친구들이 야간열차를 타고 가면서 무서운 이야기를 서로 나눈다는, 그런데 그 공포의 주인공이 바로 다몬이었다는 깜짝 반전이 인상적인 <<새벽의 가스파르>가 연이어 펼쳐진다.
다섯 편 모두 이처럼 분위기나 소재 만큼은 으스스하지만 결론에서는 말 끝맺음을 분명히 하지 않고 얼버무리듯이 “명확”하게 결말을 맺지 않는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 년 만에 다시 나타난 나무지킴이 사내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고, 다만 90년 대 초 불어 닥친 일본 장기 불황 사태의 전조(前兆) 쯤으로 그려낸다. 산의 불길한 울음소리인 “산소리(<악마를 동정하는 노래>)”나 “인지 오류 밀실”이나 무의식 중에 죽음을 예견하는 일종의 “트라우마”(<환영의 시네마>), 달빛에 의한 착각 쯤으로 짐작되는 “사구 실종”(<사구 피크닉>), 그리고 다몬이 직접 겪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건(<새벽의 가스파르>) 결말 모두 주인공 다몬의 추측 또는 예상일뿐 명확하게 결말을 맺진 않는다. 그렇다 보니 각 단편들마다 읽고 나서 전체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며 각자 그 결말을 추측하고 해석하게 만드는, 일종의 “열린 결말” 형식을 띤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보니 뭔가 분명하고 확연한 결말을 기대한 분들에게는 왠지 2% 부족한 느낌을 받을 수 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몽환적이면서 상상의 여지를 남겨 놓는 이런 결말이 더 인상적으로 느껴졌다고 평가하고 싶다. 대놓고 직접 이야기하는 것보다 읽고 나서 이야기 하나 하나 떠올려 보면 참 무서운 이야기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그제서야 오싹한 기분에 뒷통수가 서늘해지는 그런 결말 말이다. 일본 대표 공포 영화 <주온(呪怨, 2002)> - 일본 공포 영화 중 제일 무서웠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고 며칠을 밤잠을 설쳤던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쳐진다 - 처럼 직접적이고 끔찍한 묘사들은 없지만 공포를 차츰 차츰 고조시키는 이야기 전개만큼은 여느 소설이나 영화보다도 탁월한, 즉 텍스트를 읽을 때 마다 “상상”할 때 더 무섭고 그런 공포가 바로 온다 리쿠 식 “공포”라고 정의한다면 억지일까?
그렇다면 온다 리쿠는 많은 소재들 중에 왜 “공포”를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년들이 야간열차를 타고 괴담을 주고받는다는 <새벽의 가스파르> 편에서 잘 나와 있다.
무서운 이야기.
그런 것은 굳이 찾지 않아도 주위에 얼마든지 뒹굴고 있다. 사고, 지진, 병, 구조조정, 스토커, 석면. 그러나 요새 실록 괴담이 점점 더 인기를 끄는 것은, 고전적인 유령이나 저주 이야기가 오히려 향수를 자극하고 누구나 공유할 수 있어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가 이토록 세분화되어 세대 및 집단 간에 가치관의 차이가 현저해진 지금,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공포감뿐인지도 모른다. - P. 238
즉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감정이 바로 “공포”이며 그런 공포는 명확하고 실증적인 천재지변(天災地變)이나 사회 문제들보다는 그 정체가 불분명하고 인지 범위를 벗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크며 또한 모든 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통 감정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치 앞에서 흉기를 들고 쇄도하는 남자는 시각적인 두려움이 주를 이루지만, 목덜미에 소름이 쫙 돋게 하는 미지의 정체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 하듯이 말이다. 어쩌면 온다 리쿠는 현실 세계 속에 벌어지는 온갖 끔찍하고 잔혹한 사건들 때문에 어느새 무의식 기저로 숨어 버린 미지(未知)에 대한 두려움이자 원초적인 감정선을 수면 위로 끌어내고 싶었던 지도 모르겠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는 자신의 별명처럼 일종의 “그리움”과 같은 그런 감정을 말이다.
이 작품, 그래서 “온다 리쿠” 식 공포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래도 “온다 리쿠” 식 공포는 너무 밋밋하고 심심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아직 그 판단은 뒤로 미뤄도 좋을 것 같다. 보다 끔찍하고 보다 거대한 공포를 담고 있는 쓰카자키 다몬의 또다른 시리즈 <달의 뒷면>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