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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보는 소녀 ㅣ Numbers 1
레이첼 워드 지음, 장선하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대학 합격, 재물, 승진, 자식, 결혼 등 자신의 미래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꼽아보자면 끝이 없겠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즉 자신의 “수명(壽命)”일 것이다. 그런데 이 수명은 과연 “사주팔자(四柱八字)에 나오는 것처럼 처음부터 정해진 것일까 아니면 바뀌는 것일까? “살고 죽는 것은 하늘의 뜻(生來死往憑天意)”이라며 운명(運命)으로 정해졌다고 믿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리 정해지지 않았다고 믿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이어트, 건강보조식품과 약(藥)에 쏟아 붇는 천문학적인 금액뿐만 아니라 성공을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하는 하는 것도 모두다 부질없는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어쩌면 “죽는 날짜”가 미리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 - 엄밀히는 “불확실” 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지만 - 에 사람들이 그렇게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글 첫머리부터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지금부터 소개할 책이 사람들의 눈 속에서 죽는 날짜를 읽는 능력을 가진 소녀의 이야기인 “레이첼 워드”의 <죽음을 보는 소녀(원제 Numbers/솔/2012년 1월)>이기 때문이다.
열다섯 소녀인 나(“젬 마시”)는 8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고는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정학과 퇴학, 전학을 반복하는, 이른바 “문제 소녀”이다. 나에게는 절대 말 못할 비밀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사람들의 눈 속에서 “죽는 날짜(Numbers)"를 읽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8년 전에도 엄마의 눈에서 “10102001”이라는 숫자를 읽었고, 엄마는 숫자대로 “2001년 10월 10일”에 돌아가시고야 말았다. 같은 반 급우이자 역시 불량끼 많은 소년인 “테리 도슨”, “스파이더”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그 녀석을 만난 것도 아무도 없는 곳,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칠 필요도 없고 그들의 “숫자”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인 나만의 은신처 운하 다리 밑을 거닐던 어느 날이었다. 나를 보며 반가워하는 스파이더를 피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그만 녀석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고, 어김없이 떠오르는 숫자 “15122009”를 읽고야 말았다. “2009년 12월 15일”. 이제 채 석 달도 남지 않은 그 녀석과 나는 “문제아”라는 동질감 때문에 점점 가까워지게 된다. 시간은 흘러 스파이더의 “그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스파이더와 함께 템즈강 변에 위치한 “런던아이(London Eye)”에 놀러 갔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야 만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사망일자가 모두 같은 날, 그것도 바로 오늘이지 않은가! 나는 스파이더를 이끌고 부랴부랴 그곳을 떠나지만 런던아이는 영문을 알지 못하는 폭발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테러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런던아이를 헐레벌떡 빠져나오는 나와 스파이더의 모습이 고스란히 CCTV에 담겨 있었고, 우리는 테러리스트로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진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도피 길에 오르게 되고, 스파이더의 “그날”은 점점 다가오게 된다. 과연 나는 스파이더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죽는 날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 이야기라니 소재가 참 기발하고 흥미로워서 책 소개글을 대할 때부터 관심이 갔던 책이었다.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아냈을까 기대감으로 읽기 시작한 책, 그런데 읽어갈 수록 맥 빠지는 이야기에 기대감 못지 않게 실망감도 큰 그런 책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훌륭한 소재를 이렇게 밖에 풀어내지 못했을까. 이야기는 주인공인 “젬”의 과거와 스파이더와의 만남, 그리고 런던아이의 폭발 사건까지는 그런대로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데, 젬과 스파이더의 도피 장면부터는 소년과 소녀의 “가출(家出)” 사건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닌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물론 어디라 할 것 없이 범(凡) 지구적 문제가 되어 버린 “청소년 문제”를 풀어내는 솜씨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인 젬은 밝힐 수 없는 특이한 능력과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위탁 가정을 전전하는 불우한 환경 때문에, 스파이더 또한 홀 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그 나이 또래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소년들 특유의 반항끼 - 그렇다고 스파이더처럼 마약 거래한 돈을 가로채고 담임의 차를 훔쳐 탈 정도였다면 큰일 날 반항끼일 것이다 - 때문에 학교를 밥 먹듯이 빠지고 거리를 배회하는 “외톨이”가 된다. 그래서 비슷한 처지의 두 소년 소녀가 어울리게 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사랑하게 된다는 “성장 소설”로써, 그리고 사랑하는 소년을 정해진 운명에 따라 결국 잃고 마는 소녀의 아픈 사랑을 그린 “로맨스” 소설로써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영국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 책을 청소년 추천도서에 올려놓고 있고 10여 개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영화 제작이 결정되었다고 하니 책 자체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잘 쓴 성장소설이나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죽음을 보는 소녀”라는 소재가 흥미로워서였지 않은가? “런던 아이”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의 사망일자가 모두 다 같은, 그것도 바로 오늘이라는 대목에서 뭔가 신비롭고 미스터리한 사건들, 전 세계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도 있는 멋진 이야기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기대감이 절로 들었는데, 두 주인공의 어설픈 도주극이 진행되면서부터는 어느새 기대감은 눈녹듯이 사라져 버렸고 실망감이 그 자리를 채우고야 말았다. 결국 이 책도 여느 판타지 로맨스 소설처럼 “판타지”는 그저 배경일 뿐 “로맨스”가 주(主)인 그런 책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실망감은 책 탓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책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즉 오해 때문이었으니 나를 탓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이 책,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힐 수 는 없지만 마지막 결말만큼은 후속작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묘한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또한 후속작의 제목이 <Numbers 2 심판의 날>, <Numbers 3 최후의 숫자>이라고 하니 내가 “기대했던” 이야기들이 후속권들에서 펼쳐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후속권들을 기대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