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비평가와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며 새롭게 떠오른 일본의 대표적인 젊은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는 “미치오 슈스케(道尾秀介)”는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 작품이자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심리를 섬세하면서도 잔잔하게 그린 “성장 소설”인 <달과 게((북폴리오/2011년 3월)>와 가볍고 유쾌한 “코지 미스터리”인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 매장(북폴리오/2011년 11월)>라는 전혀 다른 색깔의 두 권의 책으로 만나본 적이 있었다. 두 권 다 재미있었지만 <달과 게>에서의 정서가 나와는 맞지가 않았는지 개인적으로는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 매장>에 더 점수를 주고 있는데, 아뭏튼 “진지함”과 “유쾌함”을 자유롭게 변주해낼 줄 아는 만만치 않은 필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로 평가할 만 하겠다. 이번에 “진지한” 성장 소설로 그를 다시 만났다. 바로 제 142회 나오키상 후보작품이었던 <구체의 뱀(원제 球體の蛇/ 북홀릭 / 2012년 1월)>이 그 책이다. 비슷한 분위기였던 <달과 게>와 비교하자면 이야기면에서는 좀 더 극적이고 충격적이었지만 정서적인 면에서는 역시나 <달과 게>와 마찬가지로 영 낯설고 공감하기 어려웠던 작품이었다.

 

1992년 가을 어느 바닷가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열일곱 살인 “나”(토모히코)는 4년 전 부모님의 이혼으로 그분들을 따라가지 않고 마을에 홀로 남게 된다. 이웃집 “오츠타로” 씨는 그런 나를 거두어 주어 자신의 집에 함께 살게 해주었고, 나는 평일에는 학교에 다니고 휴일에는 오츠타로 씨의 사업인 흰개미 방제(防除) 작업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함께 살게 된 오츠타로 씨 가족은 아버지인 오츠타로와 나보다 두 살 아래인 딸 “나오”인데, 7년 전 화재 사고로 그만 아내를 잃고 큰 화상을 입었던 큰 딸이자 나오의 3살 터울의 언니인 “사요” 또한 자살하면서 그만 둘만 남게 되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사실 사요의 자살과 관련하여 나에게는 말 못할 비밀이 있는데, 화상 때문에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동정심에 그녀에게 책임지겠다는 경솔한 말을 건넸고, 이에 분노한 그녀가 그만 자살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흰개미 방제 작업 중에 사요와 꼭 닮은 여인인 “토모코”를 만나게 된다. 그녀에게 끌리게 된 나는 밤마다 그녀의 집 마루 밑에 기어들어가 그녀와 나이든 집주인 남자와의 잠자리 소리를 훔쳐 듣는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날도 마루 밑에 숨어 들었던 나는 갑작스레 발생한 화재에 놀라 황급히 뛰쳐 나오다가 외출해서 돌아오던 여인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 화재로 집주인 남자가 사망하게 되고, 토모코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당신이 불을 질렀군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 당신이 그 사람을 죽여 준 덕분에."

 

아니라고 부인을 하지 못했던 나는 그녀의 집을 계속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어느날 오츠타로씨와 그녀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녀에게서 화재로 사망한 전 집주인과 함께 살았던 이유가 7년 전 오츠타로씨 가족의 화재 사고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토모코에 심한 말을 하고는 결별하게 된다. 몇 년 후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나는 토모코를 못잊어 하다가 다시 그 마을로 내려오는데, 나오에게서 토모코가 내가 심하게 말했던 그 무렵 자살했다는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는다. 나오의 언니인 사요도, 그녀와 닮았던 토모코도 모두 자신의 말 때문에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16년 후 나는 과거의 일들, 즉 오츠타로 가족 화재와 토모코 자살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보아뱀’ - 제목이기도 한 “구체의 뱀”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 즉 그냥 보면 모자 같지만 사실은 코끼리를 삼키고 있는 보아뱀이라는 무서운 그림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진실의 진정한 실체와 그 무게에 대해 생각에 잠긴다.

 

17세 소년의 결코 범상치 않은 과거에 숨겨진 비밀과 성장과정을 그린 이 책, 토모처럼 자신의 말 때문에 두 사람이 자살해버렸다면 어떤 느낌일까? 마치 두 여인의 원혼(冤魂)이 내 어깨에 앉아 나를 분노 서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는다. 그렇기에 그 후로 죄책감에 시달려 살아야 했을 토모의 모습에서 애잔함이 절로 묻어나온다. 그런데 빨리도 느리지도 않은, 에누리 없는 16년이 지나서야 과거 사건들의 진정한 진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역시 어떤 느낌일까? 그 진실은 자신의 죄책감을 사라지게 만드는 “구원(救援)”이 될 수 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죄책감에 시달렸을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허무함과 함께 진실을 감춰온 “누구”에게 지독한 배신감을 느끼고는 다시 한번 누구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극단의 결과를 초래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딱 그 시점에서 글을 멈추는 “열린 결말”로 끝을 맺는다. 이런 열린 결말이 영 개운치만은 않아 다 읽고 나서도 쉽게 책장을 덮지 못하고 마지막 결말을 다시 읽게 만들고 토모의 이후 삶은 죄책감을 벗어 던지고 행복했겠지 하고 부러 상상을 해보지만 자꾸만 극단의 결말만 떠올라 불안함마저 들게 하였다.

 

이처럼 묘한 여운이 남는 책이지만 정서적으로는 올곧이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저지른 화재가 아님에도 토모코를 놓치고 싶지 않아 애써 부인하지 않는 토모, 화재 사건을 의심하며 자신을 압박해오는 오츠타로 씨에게 혹 토모의 범죄가 밝혀질까 봐 몸을 허락하는 토모코, 그리고 토모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 나오의 행동들이 이 책의 사건을 있게 한 주요 동인이 된 것은 인정하지만 그 행동의 이유까지 공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있을 수 도 있다”는 현실감이나 개연성 보다는 그저 “허구(虛構)” 일 수 밖에 없다는 작위(作爲적인 느낌이 들어 감정이입을 이끌어내기는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이 책, “미치오 슈스케”의 진지함은 극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로써의 재미는 뛰어나지만 정서적인 면에서 공감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준 책이었다. 나에게는 역시 “미치오 슈스케”의 “유쾌함”이 더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덮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진지함이 영 불편하지만은 않은 것을 보면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같은 예감이 든다. 그의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져 있을 후속 작품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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