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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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과거 역사와 문화, 종교, 그리고 현대 정치·사회 정세에 대한 책들은 몇 권 읽은 적이 있는데, 문학 작품으로는 이번에 읽은 “아모스 오즈(Amos Oz)”의 <시골생활 풍경(원제 Scenes from a village life/ 비채 / 2012년 1월)>이 첫 작품이다. 그래서 출판사 홍보글과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모스 오즈”, 현대 이스라엘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최근 십여 년간 노벨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이스라엘 문학상을 비롯해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유명한 작가이며, 국내에도 <나의 미카엘>, <여자를 안다는 것> 이라는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작가라고 한다. 그의 최근작인 이 책의 제목인 <시골생활 풍경>만 보면 목가적(牧歌的)인 전원(田園)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짐작이 되는데, 종교 갈등이 가장 심한 곳이자 세계의 화약고(火藥庫)이다 보니 전국토가 전장(戰場) 쯤으로 여겨지는 이스라엘에서 과연 한가로운 전원생활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제목에 왠지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의 표지를 열어 들었다.

 

그런데 작가는 나처럼 생각하는 독자들을 예상이라도 한 듯 본문에 들어서기 전 초입부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흔히 분쟁 지역의 문학은 세계의 다른 한편에서 알레고리로 읽히곤 한다.

그렇지만 내 작품은 알레고리가 아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인간 실존을 담고 있을 뿐이다.

사랑, 상실, 외로움, 갈망, 죽음, 그리고 황량감 등..........

내 작품은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 아모스 오즈

 

즉 이 작품은 분쟁 지역 문학들이 그러하듯 “전쟁”이 주는 잔인함과 공포를 주제로 한 것이 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다양한 변주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변주에는 사랑도 포함되어 있지만 사랑으로 인해 행복하기 보다는 사랑으로 인해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실감을 그리고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렇다 보니 이 책에 실려 있는 8편의 단편 소설의 배경은 지금 현재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아직 건국(1948년)전인 개척자들이 세운 가공의 마을 “텔일란”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다 전 시대의 가상 공간이라면 현재에도 아직 진행 중인 아랍과의 분쟁은 저절로 배제할 수 있을 테고 그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올곳이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건국 전이라면 아직 전 세계 유태인들이 이천년 전 잃어버린 “약속”의 땅 “가나안”을 되찾겠다고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혹독하게 몰아내기 전인 유태인과 팔레스타인들이 어울려 살았던 시기였을 테니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민족, 종교 갈등도 굳이 담아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불안함”만큼은 그때도 여전했겠지만 말이다.

 

텔일란은 여느 중동(中東)의 시골 마을처럼 포도밭과 과수원에 둘러싸여 생활하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그곳에서 한가롭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사소한 듯 하면서도 일상에 작은 균열을 일으킬 만한 일들이 한가지 씩 일어난다. 먼저 아내가 삼 년 전 샌디에이고에 사는 친한 친구를 만나러 간 뒤 돌아오지 않으면서 헤어지게 된 후 늙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던 “아리에 젤니크”에게 법률회사에 다닌다는 낯선 남자 “울프 마프치르”가 찾아와 친척이라고 주장하면서 모친의 명의로 되어 있는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주변 농장을 개발할 테니 동의해달라고 한다. 마을 유일의 가정의학과 의사이자 중년의 미혼여성 “길리 스타이너”는 어릴 적부터 자주 만나온 언니의 아들 “기드온”이 군대에서 얻은 신장질환을 요양하기 위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음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리지만 자꾸 늦어지자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 나선다. 한때 국회의원이었지만 지금은 마을의 교사인 딸 “라헬”과 함께 살고 있는 “페사크 케뎀”은 밤마다 땅 속에서 들려오는 괴소리에 잠을 깨곤 한다. 딸은 잘못 들었을 거라고 타박을 하지만 같이 살고 있는 아랍인 청년 “아텔”도 그 소리를 들었다니 잘 못 들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외에도 마을의 오래된 저택을 사들여 새로 집을 지어 파는 부동산업자 “요시 새슨”, 쪽지 한 장을 다른 사람을 통해 건네주고는 가출해 버린 아내를 찾아 나선 면장 “베니 아브니”, 30세의 이혼녀를 사랑하는 17세 소년 “코비 에즈라”, 십대의 아들이 자살하자 그 죽음을 애써 잊고 싶어서인지 노래모임과 같은 가외(家外)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는, 그러면서도 그 노래모임에서 아들이 좋아했던 노래를 부르는 서글프기까지 한 “달리아”와 “아브라함 레빈 부부” 이야기가 차례대로 펼쳐지고 마지막에는 텔일란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역시 처음 짐작과 작가의 말처럼 한적하고 여유로운 전원생활과는 전혀 거리가 먼 뭔가 한가지 씩 잃어버린 사람들의 외롭고 쓸쓸한, 그리고 낯선 이야기였다. 그렇다 보니 읽는 내내 편하지 만은 않은 묘한 긴장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왜냐 하면 이 책의 이야기들이 이국(異國)의 다른 시간대에서 벌어진, 현대의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침저녁 출퇴근 길에, 그리고 길거리를 오고가며 마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평온하고 일상적인 모습 속에는 저마다의 가슴 속에 담고 있는 작은 비밀 때문에 일상에 균열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며, 세월의 더깨가 내려앉은 노인들 얼굴의 주름에도 어쩌면 나이 들면 절로 생기는 “세월의 훈장”만이 아니라 과거에 잃어버린 돈, 명예, 사랑, 가족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개수도 더 늘고 그 깊이도 더욱 깊어졌을 수 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 숨어 있는 불안감과 상실감을 시골마을의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려내려고 한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이 책에서 시골이라는 이미지 특유의 짙푸름이 아니라 회색빛 쓸쓸함이 느껴진 것이.

 

이런 글들은 작가의 말대로 아직 인생의 상처와 회한을 맛보지 못한 젊은 작가들은 쓸 수 없는, 많은 작품을 써온 오랜 경력의 작가로서도 인생에 어느 정도 내공이 생겨 삶을 관조(觀照)할 수 있는 나이 -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10년이었으니 작가(1939년생)가 일흔이 넘어서 쓴 작품이다 - 가 되어야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삶에 대한 애정과 연민 어린 시선, 그리고 통찰력은 엿볼 수 있었지만 올곧이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그처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감상을 가지기에는 아직은 내가 어린 나이일 수 도 있겠고, 내가 바라보는 삶의 방향이 그와는 다를 수 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후 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다른 느낌이 들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낯설었지만 그래도 곱씹어 볼 만한 생각꺼리를 던져 주는 책이었다. 요즈음 장르소설들을 즐겨 읽다 보니 갈수록 자극적인 재미를 주는 책들만 찾게 되는데, 가끔씩은 이 책처럼 순문학 특유의 감상과 사유를 느껴보는 것도 독서 생활에 있어서 한결 여유로움과 색다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뭏튼 “아모스 오즈”, 이 작품만으로 이런 작가다 평가 내리기에는 너무 성급할 것 같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본 후에야 그를 “제대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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