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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을 향해 쏴라 ㅣ 이카가와 시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식여행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추리소설하면 끔찍하고 잔인한 연쇄살인을 주 소재로 하고 있다 보니 음험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고, 심지어 몇몇 대목에서는 낄낄거리는 웃음마저 터져 나오게 하는, 또한 트릭과 플롯만큼은 여느 추리소설 못지 않게 치밀하고 진지하기까지 한 이상한(?) 추리 소설이 있다. 바로 “유머 미스터리”의 창시자라고 평가받고 있다는 “히가시가와 도쿠야(東川篤哉)”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그간 읽어온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 식사 후에>와 <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두 편 모두 유머스러운 캐릭터들과 기발하고 우스꽝스러운 대화들과 사건이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트릭만큼은 책 표지 문구대로 “치밀하고 대담한” 재미있는 추리소설이었다. 이번에 만난 <밀실을 향해 쏴라(원제 密室に向かって擊て!/지식여행/2012년 1월)>은 “이카가와” 시리즈 전작인 <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보다 유머는 한층 더 강화되고 트릭은 더욱 정교해진 재미있는 추리소설이었다.
때는 아직 이른 봄인 3월 10일 평범한 저녁, 이카가와 시(市) 경찰서 소속 스나가와 경부와 시키 형사는 술집에서 난투극을 벌이다가 건달 두 명을 때려눕히고 도망친 “나카야마 쇼지”를 체포하러 갔다가 그만 낭패를 당하고 만다. 그저 영장을 내밀고 - 시키 형사는 멋들어지게 내밀기 위해 몇 번을 연습을 했건만 실제에서는 처음부터 혀가 꼬이고 만다 - 체포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는데, 나카야마는 자신이 만든 사제(私製) 권총 때문에 온 줄 알고 형사들을 향해 총질을 해대고는 도망치기 위해 4층 창문을 뛰어 내렸다가 그만 추락사하고야 만다. 경부와 형사는 허겁지겁 현장으로 내려 가보지만 이런 나카야마가 들고 있던 권총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어느새 누군가가 그 권총을 집어간 것이다. 8연발 권총이었으니 둘에게 쏜 2발을 빼면 아직도 여섯 발이나 남은 권총을 집어간 사람이 무슨 일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골치가 아프고 노심초사했던 둘에게 우마노세 해안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2주 후인 3월 25일이었다. 감식 결과 총알은 바로 도난당한 그 권총과 같은 것으로 판명되고, 시신도 알고 보니 전 사건인 연립주택 밀실살인사건 -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에서 만난, 두 형사와는 영 궁합이 맞지 않은 얄미운 탐정 “우카이 모리오”와 친분이 있던 노숙자로 밝혀지게 된다. 역시 전 사건에서 범인으로 몰렸다가 가까스로 누명을 풀었던 “도무라 류헤이”는 매형인 우카이 탐정과 우마노세 해안으로 조문(弔問)을 갔다가 우연히 이카가와 시에서 유명한 식품 회사 회장인 “주죠지 죠지”의 손녀이자 해변가 “토리노미사키(새의 곶)”라는 벼랑 끝에 위치한 대저택에 살고 있는 “사쿠라”를 만나게 되고, 엉겁결에 그녀의 집까지 따라가 자신이 겪었던 살인사건을 명탐정(?) 우카이와 그의 제자인 자신의 활약으로 해결한 것 마냥 떠들어댄다.
이를 인연으로 사쿠라의 신랑감들의 뒷조사를 맡게 된 우카이는 잠복과 미행, 도청까지 이어지는 지루한 조사를 완수하고 류헤이와 함께 주죠지 저택으로 향하는데, 저택에는 마침 사쿠라의 신랑감 후보 세 명 모두가 와 있었다. 우카이와 류헤이는 주죠지 회장이 대접하는 비싼 술에 만취해 거실 쇼파에서 곯아 떨어져 자게 되는데, 류헤이는 집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한발의 총성에 번쩍 깨어나게 된다.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 보니 거실 베란다에 총을 들고 있는 하얀 복면의 남자가 달아나는 장면을 목격하고, 우카이는 남자가 쏜 총에 그만 다리를 다치고야 만다. 뒤이어 집안 모든 사람들이 총성에 놀라 거실로 모여들게 되고, 연이어 세발의 총성이 울려 퍼진다. 사라진 범인을 쫓아 나가 보니 사쿠라의 신랑 후보 한 명이 가슴에 총을 맞아 죽어 있었고, 총소리를 듣고 저택으로 달려오다 범인을 발견하고 격투를 벌이던 주죠지 회장의 보디가드는 팔에 총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벼랑 끝에는 범인이 버리고 간 총과 옷가지가 발견된다. 그런데 이 곳, 범인이 벼랑을 내려 가려면 총성 때문에 모여 있는 저택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달아날 곳이라고는 벼랑에서 투신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밀실(密室)” 인 곳이었다. 범인이 사용한 총은 역시나 스나가와 경부 콤비가 놓쳤던 그 총이자 노숙자를 살해했던 그 총으로 밝혀지게 되고, 벼랑 아래를 이 잡듯 뒤졌지만 범인의 시신은 결국 발견되지 않는다. 결국 범인은 집안 사람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는 상황, 범인의 트릭을 깨기 위한 스나가와 경부 콤비와 우카이 탐정 콤비의 불꽃(?) 튀는 두뇌 대결이 시작된다.
전작인 <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에서 악연(?)을 맺은 스나가와 경부 콤비와 우카이 탐정 콤비가 다시 등장해서 역시나 해결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밀실” 살인을 해결한다는 이 책은 전작보다 유머와 트릭 면에서 모두 한층 업그레이드된 그런 소설이었다. 먼저 캐릭터들을 본다면 여전히 형사와 탐정 두 콤비들의 엉뚱하면서도 심지어 찌질하기까지 한 모습들은 여전함을 넘어 그 정도가 한층 더 심각해졌는데, 이들보다 더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캐릭터는 전편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맨션 주인이자 열심히 오토바이를 고치고 있었던 - 자기는 고치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형사들과 우카이는 망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실제로도 망쳐버렸단다 - 미모의 여인 “아케미”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대목은 우카이 탐정 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건물을 인수하여 건물주의 신분이 된 아케미가 일 년이나 월세가 밀린 우카이와 입씨름을 벌이는 장면이었는데, 둘이 월세 때문에 옥신각신하는 장면이 마치 “만담(漫談)”을 듣는 것처럼 호흡이 척척 맞고 재미있었다. 거기에 탐정 사무소를 찾아온 “주죠지” 회장 때문에 졸지에 울며 겨자 먹기로 탐정 조수가 되어 버리게 된 아케미가 밀린 월세를 받겠다는 투철한 일념 하에 뒷조사라면 질색을 하는 우카이를 협박(?)해서 주죠지 회장의 의뢰를 받아들이게 하는 장면에서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우카이와 아케미 사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형성 - 아케미의 똑 부러진 성격이라면 집세나 밀리고 있는 무능력자 우카이를 거들 떠 보지도 않는 게 더 맞을 텐데 유머를 표방하고 있는 이상 둘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흐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될 만도 알았는데 오히려 주죠지 회장의 금지옥엽 손녀딸 사쿠라와 류헤이 사이에서 조성되는 것 또한 꽤나 엉뚱하면서도 재미있다. 전 편에서 애인과 헤어지고 난 후 술 마시고 난동을 피운 탓에 범인으로 몰렸던 류헤이, 이번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사쿠라의 하트 모양의 눈빛을 영 알아채지 못하고 결말 부분에 이르러 뭔가 눈치를 채지만 설마 하는 것을 보면 영 눈치가 젬병인 그런 친구이다. 다음 편에 류헤이와 사쿠라의 사랑이 이어진다고 해도 류헤이의 눈치 없음 병은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여전할 것만 같다.
트릭 면에서는 어떨까? 이 책에 등장하는 트릭 중 먼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발생한 “밀실” 트릭은 총성으로 사건의 순서를 착각하게 만드는 트릭이 사용되었는 데,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밀실이 만들어지는 트릭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쥐덫>이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이미 널리 알려진 트릭이니 새로울 것은 없으며 범인은 고립된 인물 중에 한 명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이 가능 그런 트릭이고, 실제로 책에서도 범인의 정체는 사건 수사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된다. 오히려 기발한 것은 범인의 살인 방법에 사용된 트릭, 즉 총성을 이용해서 사건의 순서를 착각하게 만드는 트릭인데, 이 트릭을 먼저 눈치 챈 독자들이 드물었을 것만 같은 꽤나 복잡하고 치밀하다. 작가는 여기에 “중인환시(衆人幻視)”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는데 엄밀하게는 총소리가 트릭의 도구였으니 “중인환시(衆人幻廳)”이 맞는 표현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계산해서 살인을 저질렀어야 싶은 생각도 든다. 특히 총소리 트릭과 함께 사용된 절벽 위에 놓여진 옷가지나 시신 옆에서 깨어나는 또 다른 신랑감 후보 등 범인은 나름 치밀하게 짰다고 했겠지만 누가 봐도 어설프기만 하고 괜히 사서 고생만 한 그런 트릭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추리소설 특성상 범인은 고생고생해서 예측 불허의 기상천외한 트릭을 만들어내지만 능력이 영 의심스러운 탐정과 심지어 어리 버리한 조수에게까지 간파되고 말다니 범인이 불쌍 - 물론 이런 점도 이 책을 재미있게 만들기 위한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 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뭏튼 어설픈 트릭 속에 복잡하고 정교한 트릭을 숨겨 놓은 작가의 솜씨를 보면 이 책이 단순히 웃기고 재미있는 글만이 아니라 추리 소설로써의 장르적 재미도 한껏 살려 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앞서 두 작품을 읽고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데 역시나 계속 만나게 되는 것을 보니 내 예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예감은 나 뿐 만은 아니었는지 2011년에 일본 추리소설 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4권)이 번역된 작가였다고 한다. 작가와 독자의 두뇌 싸움이라는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꼭 무겁고 어렵기만 한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담 없이 웃음 지으며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점이 “히가시가와 도쿠야” 작품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매력 때문에 벌써부터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