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홍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불의의 사고로 또는 연일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는 끔직한 범죄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영결식장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하는 장면을 보면 절로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져 온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살아 남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가슴에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화인(火印)이 박혀 평생을 아픔 속에서 살아가야 할 남은 자들의 슬픔은 어쩌면 필설(筆舌)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 일테다. 그런데 일가족이 하루 아침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홀로 남겨진 피해자의 딸, 그리고 살인사건을 저지른 살인범의 남겨진 딸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남겨진 두 사람의 삶과 상처는 과연 어떠할까? 그리고 그들이 만난다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과연 어떠할까? 감히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하고 두려운 이 상상을 소설로 만났다. SBS 인기드라마 〈연애시대〉의 원작소설 작가인 노자와 히사시의 “심홍”(원제 深紅, 예담, 2010년 7월)이 바로 그 책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가나코는 수학여행 길에 올라 친구들과 즐거운 첫날밤을 보낼 무렵, 갑자기 담임선생님이 가나코를 찾는다. 가족이 큰 사고를 당했다고, 지금 바로 도쿄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담임과 택시를 타고 도쿄로 향한다. 평생의 트라우마로 그녀를 괴롭히는 4시간 후에 도착한 가나코는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일그러진 끔찍한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부모님과 쌍둥이 동생을 만나게 된다. 수학여행 때문에 살아남게 된 가나코는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가슴에 간직한 채 고모 댁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로부터 8년 후 20살의 대학생이 된 가나코는 아직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현듯 찾아오는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던 4시간의 트라우마를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대법원에서 범인인 “쓰즈키 노리오”의 사형이 최종 확정된 후 사건 현장을 처음 발견했던 경찰의 인터뷰 기사에서 범인에게 자신과 같은 나이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

 

나도 죽이면 돼. 늘 준비해두고 있던 대사가 틀림없다. 8년 전 사건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늘 그렇게 자멸욕구를 가장함으로써 죄를 면하려는 것이다. 누가 속을 줄 알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카페에서 바텐더를 하고 있는 범인의 딸, “미호”에게 접근한 가나코는 그녀와 점점 친해지면서 마주하고 있는 거울처럼 그녀도 고통을 겪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녀에 대한 동정심과 그녀를 파멸시키고자 하는 분노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미호는 자신에게 모진 폭행을 해서 3개월 된 아이를 유산케 한 남편을 죽이고자 결심하고 가나코는 그 살인계획에 가담하게 된다. 과연 미호는 자신의 아버지의 업보를 다시 짊어지게 될 런지, 아니면 또 다른 결말에 치닫게 될 런지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 생략한다.

 

 과연 이 책을 뭐라 분류할 수 있을까? 미스터리 형식을 띠고 있지만 끔직한 살인사건의 개요와 범인, 그리고 동정심마저 드는 범인의 살해 동기는 이미 1장과 2장에 다 밝혀놓았고, 3장에서는 사건이 발생한지 8년 후 가해자와 피해자의 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딱히 추리소설로 분류하기는 그렇다. 가나코가 미호에 대해 품게 되는 적의와 분노, 시간이 흐르면서 미호에 대한 분노 대신 서서히 자리 잡게 되는 연민과 동정심, 그리고 마지막 용서와 화해에 이르기까지의 가나코의 심리 묘사는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연상될 정도로 탁월하고 몰입도 또한 강하다. 이 책이 출간될 당시의 일본 평론가들의 평을 보면 2장까지 성공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열기와 광기를 끝까지 가져간다면 엄청난 걸작이 완성되었을 수 도 있었을 것이라는 평도 있던데 - 물론 3장 이후 두 소녀의 이야기가 더욱 매력적이라는 평으로 끝난다 - 만일 그랬다면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잔혹하고 끔찍한 추리소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나코가 미호에 대해 느끼는 적의와 분노, 그리고 연민, 미호의 살인에 동참하게 되면서 갖게 되는 복잡한 심리에 대한 생생하고 탁월한 묘사야말로 읽는 독자로 하여금 가나코의 심리 변화에 따라 함께 분노하고, 함께 슬퍼하며, 고통 받는 가나코와 미호의 마음의 상처에 같이 아파하고, 미호를 파멸시키려는 가나코의 시도에 불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감정이입과 몰입감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연일 끔직한 범죄가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어쩌면 가나코와 미호는 소설 속의 상상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소설 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을 바로 우리 이웃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우리에게 당신이 바로 가나코와 미호가 될 수 있다는, 소설보다 끔찍한 현실이 바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런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상상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마지막 장을 바로 덮지 못하고 계속 들춰보게 되는,  여운이 오래 남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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