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 이순구의 역사 에세이 너머의 역사책 5
이순구 지음 / 너머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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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산율 1.21명… 222개국 중 217위(아시아 투데이, 2011-11-17)”

“핵가족에서 소핵가족으로;1인가구도 30년 만에 10배 증가”(천지일보, 2011-11-15)”

“나 홀로 가구 400만 시대(연합뉴스, 2011-12-12)”

“서울의 가장 주된 가구유형은 1인가구로 4인 가족 앞질러(뉴스웨이브, 2011-8-15)”

“[2011 결혼풍속도] 가족 해체의 시대; 新 가족의 탄생(머니투데이, 2011-5-9)”

 

뉴스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식이 부모를 부양(扶養)하고 3대가 함께 사는 전통적인 “가족(家族)”의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그런 시대가 된 것 같다. 주된 이유가 결혼 자체가 감소하고, 결혼 연령도 자꾸만 늦어지는 만혼(晩婚) - 2010년 결혼 평균 연령이 남성이 31.8세, 여성이 28.9세로 지난 2000년보다 2.5세가 상승했다고 한다 - 이 늘고 있으며, 이혼과 저출산, 인구 고령화가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청년실업과 고용불안, 그리고 갈수록 팍팍해져 가는 하는 살림살이도 주요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가족이 없다면 사람들이 딛고 설 바탕이, 안전한 버팀대가 없겠지. 병이 난 후 그 점이 더 분명해졌네” 라는 글귀처럼 가족은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고 보다 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디딤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 최소 단위의 구성인 가족의 해체는 사회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결국 사회의 붕괴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렇다면 지금보다 가족이라는 의미가 훨씬 더 강했고 결속력 또한 대단했던 한 시대 전의 “조선(朝鮮)” 시대의 가족은 지금 우리가 되살려 볼 만한 그런 모습이었을까? 그동안 보아온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봐온 것처럼 여필종부(女必從夫)와 출가외인(出嫁外人)으로 대변되는 철저한 가부장제(家父長制), 그리고 정실(正室)과 첩(妾), 장남(長男)과 서자(庶子), 적자(嫡子)와 서얼(庶孼) 등 가족 내에서도 신분에 따라 차별받던, 지금 시대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가족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여성사와 가족사를 전공하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재직 중인 “이순구” 작가는 역사에세이 <조선의 가족, 천개의 표정>에서 성리학이 사회 지배 이념이 된 조선 중반 이후에는 그런 면도 없지 않았지만 적어도 조선 시대 초·중반까지는 우리가 알던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런 모습이었으며 사회 운영의 일정 부분을 일임 받았을 정도로 절대적인 그 무엇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우선 작가는 조선 시대 특히 16세기까지 혼인은 대체로 남자 쪽이 움직이는 시스템이었다고 말한다. 혼인을 하면 여자는 그냥 자기 집에 그대로 살고, 남자가 정기적으로 자신의 집과 여자 집을 오가든지 아니면 아예 여자 집에서 눌러 사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장가(丈家)” 간다는 말이 바로 “장인 집에 들어간다”는, 즉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남자가 신부가 될 여자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른 뒤 그대로 처가에서 살다가 자녀를 낳아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돌아오는 한국 고유의 혼인 풍속의 하나. 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 책에서 수십번도 언급하는 단어이다 보니 이 책의 핵심 단어라 할 수 있겠다 - 이라는 우리 고유의 풍속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관습은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20세기 초에 이른바 “해묵이”라 하여 신부가 결혼해도 해를 넘겨 친정에 있다 오는 것도 예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장가”가고 “시집” 온다는 표현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달묵이”란 단어도 있는데, 달(月)을 넘겨 오는 것이란다. 해묵이와 달묵이, 참 재미있는 단어이다. 이런 전통은 결혼이 딸을 아들 있는 집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족을 “공유”하고 가족끼리 대등하게 결합한다는 개념에서 생겼다고 하는데, 그렇다 보니 아들과 딸의 권리와 의무도 자연스럽게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어 재산을 상속받는 권리도 아들과 딸이 균등히 가지고 있었으며(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 제사를 지내는 의무도 “윤회봉사(輪回封祀)”, “외손봉사(外孫封祀)”, “분할봉사(分割封祀)”라 하여 아들과 딸에게 비교적 균등하게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오늘날 명절만 되면 주부들이 차례 음식 마련과 손님 접객에 허리가 아프고 근육통을 호소하는 이른바 “명절증후군”으로 고생들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여자들의 제사에 대한 느낌은 지금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남”이나 마찬가지인 시집 조상들이나 부모님이 아닌 자신의 친정어머니 제사를 지내면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전통이 바뀌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조선 중후기에 들어 “성리학(性理學)”이 조선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시스템”에 변화가 왔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우리나라의 가족과 친족제도는 유교의 성(性)/남녀(男女), 연령/장유(長幼), 혈통/종지(宗支), 신분계층/반상(班常) 등에 의한 위계질서가 조화로운 사회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추구하는 종법제도(宗法制度)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부계(父系)의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혈통 계승을 중요시하게 되고 재산 상속뿐만 아니라 지위 계승, 제사상속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적장자를 우선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시기부터 조선의 여성들은 딸에서 며느리로 주된 정체성이 바뀌게 되어 여성들은 ‘시잡살이’를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딸로서의 권리를 잃어갔지만, 반면 며느리나 적처로서의 권리와 위치는 더 강하게 보장받기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알려진 일곱 가지 이혼 사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이 때문에 부인이 쫓겨난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그 중 하나인 “자식 못 낳는 죄”도 적처와 총부(冢婦; 남편이 죽고 없는 맏며느리)들이 제사권(祭祀權)을 유지 - 제사권이 상속권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 하기 위해 양자(養子)들이기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강수연 주연의 영화 “씨받이”에서도 며느리를 내쫓지는 않았던 것을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책에서는 이렇게 조선시대의 가족들의 모습을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성 우월의 가부장적이기만 하고 신분 차별의 가족 관계였던 줄 알았던 조선 사회가 그런 모습은 조선 후반에나 나타날 뿐 조선 중반까지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대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가족 관계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 안 한다”고 할 정도로 남자들에게는 치욕으로까지 여기는 처가살이 기피 현상이나 처부모 부양 문제, 수많은 논란과 갈등 끝에 결국 폐지가 되었지만 아직도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 “호주제(戶主制)” 폐지, 명절 때마다 겪게 되는 명절증후군 들도 우리 전통 결혼 풍습과 관념에서 해결책의 실마리를 찾을 수 도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라고나 할까? 물론 가족 해체 현상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경향이라고 하니, 그리고 사회발달구조 상 예전처럼 대가족제도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구조까지 와 있는 이상 과거로의 “회귀(回歸)”는 발전이 아닌 퇴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들과 딸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처가(妻家) 식구들을 귀히 여겼던 조선시대의 가족관(家族觀) 만큼은 오늘날에도 한번쯤 되새겨볼 만한 그런 생각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 그렇다고 가족 문제의 해법을 찾아보겠다며 정색을 하고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에 소개되어 있는 각종 역사 에피소드만 해도 충분히 신기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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