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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양억관 옮김 / 이상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대형 서점 추리소설 코너를 넘어 이제는 소설 전체 코너를 점령할 기세로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일본 추리소설은 정교한 트릭과 플롯, 치밀한 이야기 전개와 허를 찌르는 반전 등 추리소설 본연의 재미를 한껏 살린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전 미스터리”, “사회파”, “신본격파”, “서술 트릭”, “코지 미스터리”, “여행 미스터리” 등 다양한 형태의 장르를 자신의 취향에 따라 골라 읽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중 현실의 사회를 무게 있게 다루는 장르를 “사회파” 추리라고 하는데, 주요 특징을 살펴보면 사회적인 문제를 테마로 삼고, 탐정보다는 주로 형사가 사건을 수사하며, 트릭보다는 사회적인 범죄에 얽힌 인간 군상을 묘사하는 데 역점을 두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또한 충격적인 반전보다는 치밀한 수사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미스터리가 해결되며, 범인들은 오히려 피해자로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과거에 당한 각종 폭력과 핍박을 복수하기 위해 범죄를 계획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오랜 기간에 걸쳐 주류를 이뤄왔다는 사회파 추리는 우리나라에서도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와 <이유>,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등 수많은 걸작들을 만나볼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장르를 대표하는 작가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를 제일 먼저 꼽는다고 한다. 1950년에 등단해 40여 년 동안 1,000편에 이르는 작품을 선보여온 일본 문학계의 거물이자 그의 등장 전·후로 일본 추리 문학계가 구분될 정도이며, 작금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꼽을 정도라니 일본 추리 문학계에서의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가 있을 것이다. 일본 추리 소설을 즐겨 읽다 보니 그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아직 그의 작품을 만나보지 못했는데 - 인터넷 서점에 그의 작품을 검색해보니 수입서적이 대부분이고 번역된 작품은 단편선과 장편 몇 권 정도이다 - 드디어 이번에 그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제로의 초점(원제 ゼロの焦点 / 이상북스 / 2011년 11월)>이 그 책이다.
아직 전흔(戰痕)이 채 가시지 않은 1957년, 올해 스물 여섯 살의 미혼 여성인 “이타네 데이코”는 서른 여섯 살의 A광고회사 호쿠리쿠(北陸) 지점장인 “우하라 겐이치”와 그 해 가을에 선(先)으로 만나 11월에 결혼을 한다. 선을 보고 결혼하기까지 시간 여유가 별로 없어서 그와 데이트 한번 제대로 못해봤고, 일에 대한 것도 그렇고 형님 집에 같이 살았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불안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결혼이란 상대에 대한 그런 정도의 막연한 이해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기며 결혼을 승낙한다. 신혼 여행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와 일주일이 지난 후 남편은 본사 발령이 떨어져 자신이 근무했던 “가나자와(金澤)”로 돌아가 사무실 인수인계와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말하며 기차에 오른다. 일주일 후 데이코는 집에서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지만 남편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기차역에서 기차에 오르던 남편의 모습이 바로 데이코가 본 우하라 겐이치의 마지막 모습이었던 것이다. 데이코는 남편의 사무실이 있던 가나자와로 찾아가 남편의 후임인 “혼다”의 도움으로 남편의 행방을 수소문하지만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역 경찰에 실종신고를 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남편의 과거에 의문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남편의 짐 속 법률 책에 꽂혀 있던, 양옥집과 낡은 집을 찍은 두 장의 사진도 그렇고 회사 사무실 어느 직원도 남편이 기거하고 있는 숙소를 모른다는 점도 그렇다. 데이코는 양옥집 사진이 남편과 절친했던 거래처 사장 “무타로”의 집임을 알게 되지만 허름한 집 사진에서는 남편과 어느 여인과의 끈이 있음을 예감하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 남편의 행방 수소문이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드디어 큰 일이 벌어진다. 역시 남편의 행방을 조사하러 가나자와에 온 남편의 형인 “쇼타로”가 청산가리가 든 술을 마시고 죽은 채로 발견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데이코를 도왔던 “혼다”도 도쿄에서 의문의 여인을 조사하다가 독살당한 채로 발견되고, 의문의 여인이자 쇼타로와 혼다를 독살한 범인으로 여겨지는 “히사코” 또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고야 만다. 데이코는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의 내막을 어느 정도 추리해내지만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만큼은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하지만 우연히 방송을 보다가 진정한 정체를 깨닫게 된다. 과연 남편의 실종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누구일까?
(이하 감상에서는 스포일러가 일부 노출되어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실종된 남편을 찾기 위한 아내의 여정(旅程) 속에 만나게 되는 미스터리 쯤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사회파” 추리의 전형(典型)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회적 문제”는 종전(終戰)후 일본의 여성들이 “점령군”이었던 미군들과 자의에 의해 또는 생존을 위해 매춘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쟁의 상흔이 어느 정도 가시고 사회가 점차 안정을 찾아갈 무렵이었던 1950년대 후반, 매춘을 했던 그 많은 여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여인들은 <주홍글씨>처럼 사회의 온갖 멸시와 혐오를 온 몸으로 견뎌내며 음지(陰地)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지만, 어떤 여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양지(陽地)에서 새로운 이름과 신분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녀의 과거를 알아보는 사람들과는 절대로 마주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말이다. 그런데........그 바람은 산산이 부서진다. 바로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애써 감춰온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그동안의 모든 행복이 산산조각 나버릴 상황에서 범인은 자신의 행복을 지켜내기로 결심한다. 바로 끔찍한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 범인의 애닯픈 몸부림에 일견 동정이 가는 이유도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전쟁의 비극을 온 몸으로 견뎌낸 피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책에는 탐정이 등장하지 않고 여주인공인 데이코가 남편의 행적을 추적하며 얻은 자료를 통해서 사건 전말을 추리해내는 역할 - 물론 경찰도 등장하지만 그다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 을 하면서 계속되는 수소문과 조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미스터리가 해결해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등 사회파 추리의 전형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렇다면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어떨까? 사실 데이코가 남편의 행방을 추적해가는 과정이 지루한 감이 없지 않으며, 시아주버니의 죽음과 연이어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도 치밀하게 계산된 트릭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비밀을 감추기 위해 우발적으로 저질러지는 살인의 “연속” - 고전 추리소설들을 보면 첫 살인은 계획에 의한 것이지만 이어지는 살인들은 그 살인을 감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경향의 작품을 종종 만날 수 있는데 이 작품도 그와 비슷한 경향을 선보인다 - 에 지나지 않으며, 결말에서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가 다소 의외이긴 하지만 반전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밋밋하다고 할 수 있어 재미 면에서는 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사회파 추리 소설 작품들이 사회파 추리소설의 전형을 올곧이 따르지 않고 서술 트릭이나 다른 추리기법과의 혼합 작품들이 많아 사회파 추리소설의 참맛을 맛보기가 어렵다면 이 작품은 사회파 추리 소설 태동기의 원형(原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읽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파 추리가 어떤 장르인지 알고 싶다면, 또한 “마쓰모토 세이치”가 왜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