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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레즈 서클 1
로버트 러들럼 지음, 김양희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영화 역사상 최장기 시리즈이자 가장 성공한 첩보 영화가 바로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라고 하지만 요즈음에는 예전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제임스 본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소련의 KGB가 소련 붕괴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주적(主敵)인 KGB가 몰락하고 나니 서방 진영의 첩보기관 - 제임스 본드가 소속되어 있던 영국의 MI6, 미국 CIA 등 - 들도 무기력증에 빠졌는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유명 정치인 사생활 조사와 같은 흥신소 역할을 하지 않나, 기껏해야 산업스파이 색출, 동남아·중남미 마약조직 소탕 - 실제로 지난 2005년에 영국 “로빈 쿡” 외무장관은 자국의 첩보기관인 MI6을 동남아를 무대로 활동 중 인 국제 마약 밀매조직들과 싸우는 최전선에 배치하겠다 "고 밝힌바 있었다고 한다 -에나 나서고,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변변한 실적 하나 못 올리고 여전히 헛다리만 짚고 있는 퇴물 취급당한 지가 오래 되었다. 역시 실제이든 허구이든 “첩보(스파이)”물의 전성기는 선(서방진영)과 악(공산진영)의 구별을 뚜렷하게 할 수 있었던 “철(鐵)의 장막(iron curtain)”이라고 불리던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이 건재했던 “냉전(冷戰, Cold-War)"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그런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근사한 첩보 소설을 만났다. 바로 007 시리즈 이후 최고의 첩보 스릴러 영화 시리즈로 평가받고 있다는 “맷 데이먼” 주연의 <본 시리즈>의 작가로 알려진 “로버트 러들럼(Robert Ludlum)의 <마타레즈 서클(원제 The Mataresse Circle / 노블마인 / 2011년 11월)>이 바로 그 작품이다.
미국과 소련이 패권을 다투던 냉전시대의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의장인 “앤서니 블랙번” 장군이 뉴욕 도심가 비밀 사창가 저택에서 킬러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책 회의에 나선 미국 대통령과 CIA 국장, 국무장관은 KGB의 소행으로 의심하지만 "적색 전화(핫라인)“으로 긴급히 연락해 온 소련 수상은 자신들의 연관성을 극구 부인한다. 얼마 후 소련 최고의 핵물리학자인 “유리예비치”가 휴가 중에 역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역시나 미국 대통령이 즉시 소련 수상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들은 관여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서로의 소행이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간 큰 국가가 세계를 양분하는 국가인 미국과 소련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미 합참의장 살인 사건 제 일 용의자로 거론되기도 했던 소련 KGB 최고 요원 “바실리 바실로비치 탈레니예코프”는 죽어가는 옛 스승에게서 엄청난 비밀을 듣게 된다. 바로 현 소련 수상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 암살 - 미국 제 32대 대통령인 루스벨트의 죽음과 스탈린의 죽음도 이들의 짓이라고 한다 - 을 저지르는 비밀 단체 “마타레즈 서클”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이 지금 단순히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뭔가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막을 사람은 탈레니예코프와 서방 진영 최고의 첩보 요원이라 할 수 있는 “브랜던 스코필드” 밖에 없으니 둘이 손을 잡고 그들의 음모를 막으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탈레니예코프는 난감함을 느낀다. 스코필드가 누군가. 동베를린에서 근무할 당시 자신이 한때 사랑 했던 여인이 서방측 첩보원들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자 보복으로 자신의 킬러팀을 보내 스코필드의 아내를 죽이지 않았던가. 또한 스코필드도 보복으로 역시 탈레니예코프의 친동생을 죽여 버린, 둘의 관계는 그야말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몇 몇 원로들에게 마타레즈 서클의 존재를 확인한 탈레니예코프는 원한 관계를 잠시 접고 스코필드와 손을 잡기로 하고 그에게 연락한다. 그런데 마타레즈 서클이 이를 알아챘는지 KGB를 조정해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한편 스코필드는 제거하라는 이중 스파이를 놓아주었다가 본부로 소환되고 은퇴를 종용 당한다. 그리고 그에게도 제거 명령이 내려지고 유럽의 킬러들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한다. 절대 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마침내 만난 미국과 소련 최고의 첩보원인 두 사람은 마타레즈 서클의 음모를 막기 위해 가슴 속 원한을 잠시 묻어두고 손을 잡게 된다. 마타레즈 서클이 태동했던 “코르시카 섬”에서부터 조사를 시작한 그들은 점점 더 음모의 실체에 다가서고 그럴수록 수차례의 위험한 죽음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기지만 탈레니예코프는 그들에게 잡히고야 만다. 그를 구출하기 위해 마타레즈 서클 회합에 잠입한 스코필드는 마침내 “양치기 소년”으로 불리는 마타레즈 서클의 숨은 지배자를 만나게 되고, 미국과 소련을 지배하는 주요 인물들이 서클의 멤버였음을 알게 되고 경악한다. 과연 둘은 서클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을까? 서클과 두 첩보원과의 마지막 전투가 숨 가쁘게 전개된다.
대표적 첩보소설 작가인 “프레드릭 포사이드”, “이언 플레밍”, “톰 클랜시”의 몇 몇 작품은 읽어봤지만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해서 첩보물은 역시 소설보다 영화가 더 낫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보니 처음 1, 2권 800 여 페이지가 넘고 작은 글씨로 빽빽한 책을 받아 들고서는 이 책 언제 다 읽나 싶어 난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책 첫 도입부부터 미소 양국의 중요 인물의 암살과 최고의 첩보원의 만남이라는 시선을 확 끄는 설정을 배치하여 흥미와 기대를 절로 불러일으켜 난감함은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책에 금세 몰입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장면이라 할 수 있는 두 남자의 만남 장면 - 마치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을 절로 연상케 할 정도로 스펙터클하다. 세세한 소개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생략한다^^ - 에서의 액션은 긴장감과 스릴을 최고조로 이끌어 절로 손에 땀을 쥐게 하고 호흡이 가빠지게 만들어 책장 넘기는 속도를 점점 빨라지게 하지만 중반 부분에서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에서는 너무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어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기도 했다. 이 부분은 작가가 한때 ‘전직 CIA 요원’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첩보원들의 세계를 현실감 있고 개연성 있게 그려내기로 유명했다고 하니 장점이 될 수 도 있지만 빠른 이야기 전개를 즐겨하는 독자들이라면 꽤나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그런 대목들은 살짝 살짝 스킵(SKIP)하면서 읽어서 그런지 나에게는 그다지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야기가 전개될 수 록 점점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첩보 소설 특유의 전개 때문인지 결론이 궁금해서라도 도저히 책에서 쉽게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데, 마침내 결말에 이르러 마타레즈 서클과의 최후의 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리고 통쾌하고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마치 장편의 서사시(敍事詩) 한 편을 읽은 느낌이라고 할까? 서로 원수인 최고의 첩보원 두 남자가 협력해서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비밀단체와 맞선다는 기발하고 흥미로운 설정과 이야기 전개 - 지금이야 이런 설정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어 식상함마저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책의 출간년도가 30년도 훨씬 전인 1979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고인이 된 작가가 괜히 억울하게 느낄 법도 한 놀랍고 신선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사실감 넘치는 첩보 세계의 묘사, 긴장과 스릴을 자유자재로 변주해내는 글솜씨 등 첩보 소설의 장점들을 모아놓은 이 책 만 읽어봐도 “로버트 러들럼”이 왜 “첩보 소설의 거장”이라고 평가 받는지 여실히 증명해주는 그런 책이라 하겠다. 첩보 소설의 재미를 맛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유하고 싶을 정도로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끝으로 사족 하나 붙여본다. 이 책 소개글을 보면 “톰 크루즈”와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우선 두 배우와 이 책의 두 주인공의 이미지가 쉽게 매칭이 되지 않고 현실에 맞춰 미국과 러시아로 설정해 각색을 한다면 냉전시대의 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어정쩡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다소 우려가 된다. 차라리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냉전의 긴장감이 살아있는 한반도를 배경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이런이런 이미 이와 비슷한 구도인 드라마인 <아이리스>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마타레즈 서클과 비슷한 비밀 단체 “아이리스”도 그렇고 남북한 첩보원들이 연합해서 아이리스의 음모를 막아내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드라마 <아이리스>가 이 책을 모티브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만큼 이 책의 설정이 지금은 흔히 만나볼 수 있을 정도로 후대의 첩보물 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런 작품이라는 방증일 수 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