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쫓기게 된다는 설정은 지금 언뜻 생각나는 작품만 해도 “이사카 코타로”의 <골든 슬럼버>, “스티븐 킹”의 <쇼생크 탈출>.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도망자>등 많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지만 실제로 나에게 일어난다면 어떨까?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명석한 두뇌와 자신의 무고(誣告)를 밝혀내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없는 평범한 나로서는 십중팔구 도망치다 지쳐 자수(自首)하거나 또는 그 절망감에 끔찍한 선택을 하고 말 것 같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최근 우리나라 신구 세대 추리 소설 작가들의 단편을 수록한 <목련이 피었다>에서 불륜 아내의 일기장 속 남자들을 살해하는 남편 이야기인 <그녀는 알고 있다>로 꽤나 인상 깊었던 신예 작가 “손선영”의 신작인 <죽어야 사는 남자(황금펜/2011년 10월)>은 이처럼 살인 누명과 추격이라는 설정을 우리 사회 상황으로 새롭게 구성하고 창조하여 신선하고 충격적인 재미를 주는 멋진 추리소설이었다.
10년 만에 노숙 생활을 청산하고 애인과 새로운 삶에 살아가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이지훈은 말소된 주민등록을 살리려 주민 센터를 찾아간다. 드디어 새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는 날, 다시 찾은 주민센터에서 지훈에게 건넨 것은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형사의 “살인자 이대형”이라는 청천 벽력같은 외침과 거친 추격이었다. 새로운 삶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어버린 지훈은 희미한 과거를 아무리 떠올려 봐도 자신은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으며 이대형이란 이름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자신을 신고했던 주민 센터 여직원의 집을 찾아간 지훈은 자신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또 다른 “이지훈”의 존재를 알아내고 그를 찾아간다. 그런 그를 주민센터에서 추격해온 “백용준” 형사와 10년 전 이대형 살인 사건을 수사했던 “황재현” 형사가 그 뒤를 쫓기 시작하고, 여기에 의문의 잔혹한 킬러 “똥개”와 흥신소 “양상사”까지 저마다의 사연으로 가담하면서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추격전이 펼쳐진다. 마침내 “가짜” 이지훈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총을 꺼내들고 서로에게 총을 쏘기 시작한다. 여러 발의 총성(銃聲)이 울린 끝에 “진짜”와 “가짜” 이지훈과 양상사, 그리고 이 사건과 연관이 있던 고위급 형사가 그 자리에서 죽고, 킬러 똥개와 백용준 형사는 심한 부상을 입고 병원에 호송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고야 만다. “진짜” 이지훈의 진실은 이대로 묻혀져 버리고 마는 걸까. 아니다. 사건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위에 잠깐 소개한 줄거리가 첫 단락인 “이 남자가 사는 법”이고 이어서 가짜 이지훈의 아내였던 조영미의 이야기인 “이 여자가 사는 법”, 병원에서 탈출한 킬러 똥개의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그 남자가 사는 법”, 모든 사건이 완결되는 “사는 법” 이렇게 네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책을 처음 읽으면서는 주인공 “이지훈”이 자신의 살인 누명을 벗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앞서 언급했던 소설과 영화들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전개되겠거니 하고 미리 짐작하고 읽었는데 첫 단락에서 총격전 끝에 죽어 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에 “누명 벗기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반 이상 남은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하나, 혹시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리는 것 아냐 하는 당황한 마음까지 들었다. 연이어 조미영의 이야기 또한 뜬금없어 - 물론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이야기니 완전 뜬금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첫 번째 단락에서 기껏 전개해온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다 - 갈수록 점입가경이구나 싶었는데, 세 번째 단락에 들어서자 드디어 이야기의 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앞서 말한 소설과 영화에서의 “살인 누명 벗기기”라는 흔하디 흔한 이야기를 답습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런 흔한 이야기를 연출해낸 이 사회 구조의 모순과 부조리를 꼬집는, 작가가 “작가후기”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회파” 추리 소설이었던 것이다. 즉 이지훈의 이야기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지훈이 겪었을 고통과 험난한 누명 극복에만 초점을 맞추는, 즉 에피소드에 집중했던 나머지 주인공 - 엄밀히는 주인공으로 오해한 - 의 죽음에 당황한 셈이다. 사회파에 초점이다 보니 3번째 단락에서는 이지훈 사건 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한 것으로 짐작되는 스물 네 구의 시체를 만들어낸 세력들의 “꼬리 자르기” 연쇄 살인과 이를 막으려는 형사들의 분투가 펼쳐지지만 그럼에도 사건의 모든 의문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단락은 마무리가 된다.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 있으며, 이 엄청난 사건 - 책에는 참 많은 시체들이 등장한다 - 을 저지른 세력들은 누구인지 궁금해서 바로 4번째 단락으로 넘어가서 마침내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 까지 숨 돌릴 겨를 없이 내처 읽게 만든다. 단순할 것 같은 에피소드에서 사회 전체에 얽혀 있는 범죄라는 거대한 이야기로의 전환을 작가는 단락 단락을 통해서 전혀 억지스럽거나 지루함 없이 점진적으로 이야기를 확대해내가 페이지가 거듭할 수 록 더 몰입하게 만들고, 결국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의 시선을 붙들어 놓게 만든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이 책의 가장 큰 재미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주요 설정이라 할 수 있는 주민등록증 해킹과 위변조, 그리고 신분 세탁 등 우리 사회 현실에 바탕을 둔 설정과 트릭이라 더 공감이 될 수 있었던 점도 책의 재미를 한껏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언론에서도 심심찮게 오르내리듯이 노숙자들의 명의를 도용해서 금융사기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심지어 신분을 바꿔버리는 사례 또한 적지 않다고 해도 이 책의 설정을 순전히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라고만 보기에는 그 현실감이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 독자들이라면 가슴 철렁할 그런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우리처럼 지문날인과 주민등록증 체제가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 단초는 책에서도 등장한다. 바로 일본 추리소설의 아이콘이라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이라는 <용의자 X의 헌신>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에 열광하는 독자들 대부분이 <용의자 ~>에서 시작했을 텐데 사실 난 그 책을 읽으면서 꽤나 실망을 했었다.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든다는 치안국가인 일본에서 얼굴과 지문을 훼손했다고 피해자의 신원을 밝혀내지 못한다는 것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아 일본 경찰 시스템에 대한 히가시노식의 조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일본의 주민등록증이라 할 수 있는 “주민기본대장카드”는 우리처럼 지문을 날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범죄자에게만 지문 날인을 하는 일본 시스템으로는 범죄 기록이 없는 일반 시민이라면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즉 일본 상황에는 적절한 설정이었던 셈인 것이다. 아마도 이 책에서 주민등록증을 이용한 신분 세탁 방법도 우리들이야 쉽게 공감하겠지만 우리와 다른 신분 확인 제도를 가진 국가라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거나 또는 “비인권적”, “비민주적” 제도라고 비난할 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외국인의 관점에서 말이다^^
물론 이 책에도 몇 몇 아쉬운 점이 보인다. 우선 많은 인물들의 등장하다 보니 인물들의 개성이나 구별이 분명치 않고 몇몇 인물들은 그저 배경처럼 그려지는 캐릭터 설정이 다소 미흡한 점을 들고 싶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백용준 형사나 황재현 형사는 그다지 구별이 잘 되지 않는 비슷비슷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고, 지훈의 애인과 지훈의 정체를 백용준 형사에게 알린 주민센터 여직원 - 백용준과 로맨스를 연출하는 또다른 역할도 하지만 - 은 그저 단역에 불과할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한 두 번째 단락의 “조영미”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는 꽤나 재미있고 충격적이지만 전체 맥락에서는 아무래도 뜬금없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다만 작가가 미처 다 하지 못한 등장인물들은 다른 이야기로 이어가겠다는 뉘앙스를 보여주고 있으니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복선(複線)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작가가 공들여 쓴 글을 어쭙잖게 평가하려니 영 계면쩍고 부끄럽기까지 하지만 이 책,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요즘 봇물처럼 출간되고 있는 일본 추리소설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올해 들어 “우리나라” 추리 소설들을 몇 권 읽었는데, 하나 같이 기대 이상의 재미를 맛 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우리 추리 소설도 결코 암울하지만은 아닌,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몇 권에 지나지 않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꿋꿋이 우리 추리 소설계를 지켜 나가고 있는 손선영 작가와 여러 작가들의 노력과 수고가 계속 이어진다면 희망은 그저 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현실로 이뤄질 것이라고 굳게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