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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신진 작가로는 가장 주목받는 작가라는 “미치오 슈스케(道尾秀介)”는 2011년 나오키 수상작품인 <달과 게(북폴리오/2011년 3월)>로 한번 만나본 적이 있는데, 추리소설로 유명한 작가인데다가 광고 문구인 "엄마의 남자가 사라지게 해주세요" 때문에 추리소설이겠거니 하고 읽다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심리와 성장과정을 섬세하고도 잔잔하게 그린 성장 소설이어서 다소 당황했던, 그리고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결말 때문에 “유년시절을 서정적으로만 그려낸 작품이 아닌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라는 어느 일본 작가의 감상평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참 “묘한” 소설이었다. 독특한 느낌의 작가였던 터라 그를 유명하게 만든 전작 "추리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 싶었는데, 이번에 바람대로 그를 추리소설로 다시 만났다. 다만 무거운 정통 추리소설이 아닌 웃음끼 가득하면서도 잔잔한 감동마저 느낄 수 있는 가볍고 유쾌한 “코지 미스터리”로 말이다.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북폴리오/2011년 10월)>이 바로 그 책이다.
친구인 “가사사기”와 함께 중고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나(히구라시)”는 매번 인근 절 스님에게서 쓸모도 없는 중고 물건들을 바가지를 써서 비싼 값에 사올 정도로 장사 수완이라고는 영 젬병인 그런 사람이다. 개장한지 3년 째 적자에 허덕이는 이 중고매장에는 숨은 사연이 있다. “머피의 법칙” 원서를 끼고 다니며 허풍끼가 다분한 가사사기가 사실은 셜록 홈즈 찜 쪄먹을 정도로 명석한 추리 솜씨를 발휘하여 중고 물품에 얽힌 수수께끼를 척척 풀어대는 것이다. 즉 중고 물품 판매가 주업이고 탐정이 부업인 셈이다. 그런데 사실 말도 안되는 추리를 남발하는 가사사기의 뒷수습은 올곧이 나의 몫으로 설레발 떠는 가사사기 대신에 나는 수수께끼를 풀고 범인을 잡아내는 숨은 탐정 노릇을 하느라 꽤나 피곤하다. 그런데 그 일을 그만둘 수 가 없다. 어떤 사건 때문에 알게 되어 매장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는 된 여중생 “미나미 나미”가 가사사기의 천재적 두뇌 솜씨에 홀딱 반한 나머지 그를 추종하는 지라 어린 소녀의 그런 믿음을 깨뜨릴 수 가 없기 때문이다. 책에는 가사사기와 히구라시 콤비가 중고 물품 매입과 판매 과정에서 겪은 수수께끼 사건들을 네 계절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는데, 먼저 <봄|까치로 만든 다리> 편에서는 청동 독수리 상에 얽힌 방화사건과 동상 속에 감춰진 비밀을, <여름|쓰르라미가 우는 강> 편에서는 간만에 살림살이 일체를 주문한, VIP 급 주문을 해온 공방에서 만나게 되는 미스터리를 해결한다. <가을|남쪽 인연> 편에서는 중고 매장 식구나 마찬가지인 “미나미 나미”를 만나게 된 사건을 소개하고, 마지막 편인 <겨울|귤나무가 자라는 절> 편에서는 매번 히구라시에게 바가지를 씌워 온 인근 절 주지 스님과 의붓아들에 얽힌 사건을 해결하면서 주지 스님의 의외의 면을 발견하게 된다.
4편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사실 “범죄”라 부르기에 민망한 소소한 사건들이지만 각 사건들에는 결코 밋밋하지 않은 트릭들이 숨겨져 있다. 나서기 좋아하고 자칭 타칭 - 여기서 타칭은 여중생 소녀 “미나미 나미”에게만 해당되겠지만 - 천재적 추리 솜씨를 가지고 있는 중고매장 사장 가사사기는 나설 때 안 나설 때 가리지 않고 사건 속의 트릭을 밝혀내겠다고 나서는데, 부점장이자 친구인 “히구라시”는 친구를 위해 증거를 조작하고, 징역 3년 이하의 엄벌에 처할 수 도 있는 한밤중 월담도 서슴치 않으며,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림에도 불구하고 가사사기의 엉터리 추리를 증명해야 하는 밤샘 작업을 해야 하는 등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그런데 그 의도가 수시로 드나들며 가사사기를 해바라기하는 소녀 “미나미 나미”의 그 믿음을 깨지 않기 위해서라니 그 마음이 참 갸륵하고 이쁘기까지 하다 -왠지 성적 취향이 의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불순한 마음은 접어두기로 하자 -. 이처럼 반대로 뒤집혀 버린 셜록 홈스(가사사기)와 와트슨(히구라시) 콤비가 벌이는 추리극(推理劇)이 꽤나 유쾌하고 즐겁게 펼쳐진다. 이런 기발한 트릭과 추리, 코믹스러운 인물 관계 설정에서 오는 재미 외에도 에피소드들도 재미와 함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남편의 유언을 지키려고 도둑질과 방화까지 저지르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감싸려고 어설픈 연극을 벌이는 아들(->까치로 만든 다리), 여자에게는 힘들기 짝이 없는 공방 일을 마치고 이제 정식 제자로 임명되지만 진로 문제로 갈등하는 여자 후배와 그런 후배를 격려하려는 남자 선배의 따뜻한 배려(->쓰르라미가 우는 강), 사업 실패로 가족을 떠나야 했지만 딸이 못내 걱정되어 몰래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남쪽 인연), 사별(死別)한 아내의 유언을 가슴 속에 깊이 새겨 의붓아들에게 사랑을 쏟는 주지 스님(-> 귤나무가 자라는 절) 등의 사연들은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 흘리는 큰 감동은 아니지만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흐뭇하고 잔잔한 감동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절묘한 트릭과 플롯, 뒷통수를 후려치는 충격적인 반전, 그리고 자극적인 살인사건 등 무거운 느낌의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영 심심하고 밋밋한 추리 소설이겠지만 역시나 묵직한 정통 추리소설 매니아를 자처하는 나이지만 읽는 내내 입가를 떠나지 않은 미소와 함께 잔잔한 감동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읽고 나서도 유쾌하고 즐거운 느낌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 이런 작품을 읽는 것도 꽤나 기분 좋은 책 읽기였다고 생각된다.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은 앞에서 말한 <달과 게> 한 편 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간의 작품들이 인간의 나약함과 어두운 본성을 파고드는 묵직한 글들이었다는데, 작가가 이번에는 작품의 출발점을 ‘이런 녀석들이 있으면 좋겠다’, ‘이런 녀석들을 만나고 싶다’라는 꿈에 가까운 인물들을 등장시켜 자신이 만든 가공의 세계 속에서 제약 없이 자유롭고 즐겁게 지내도록 한, 그래서 이 작품이 자신의 ‘진지한 놀이’라고 자평했다고 하니 작가도 이 작품을 쓰면서 꽤나 낄낄대고 웃었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달과 게>를 읽고 성장소설 특유의 감동을 느끼는 데는 실패해서 결코 편히 읽히는 책은 아니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은 작가가 의도한 재미와 감동 코드를 올곧이 이해할 수 있었던, 그래서 더 유쾌하고 즐거웠던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