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 대표 작가로 평가받는 “기리노 나쓰오(桐野夏生)” - 작가 사진을 보면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 의 대표 작품인 “미로” 시리즈는 “무라노 미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비채/2011년 5월)>과 미로 외전(外傳)격으로 미로의 아버지인 “무라노 젠조”가 주인공인 <물의 잠, 재의 꿈(비채/2011년 5월)>을 지난 2011년 6월에 함께 읽었었다. 두 권 다 그동안 읽어본 일본 추리소설 전형 - 현실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재 탐정, 틀에 박힌 스토리와 억지스러운 반전 - 과는 구별되는 현실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주인공들의 활약에 신선하고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었던 터라 느낌이 좋아서 후한 평가를 줬던 그런 작품이었다. 두 책을 읽은 지 4개월 여 만에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단편 모음집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로즈가든(원제 ロ-ズガ-デン/비채/2011년 10월)>이 바로 그 책이다. 하나의 사건을 긴호흡으로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미로의 활약을 맛보는 전작의 재미도 좋았지만 여러 사건 속에서 다양한 모습의 미로를 만나는 재미 또한 꽤나 쏠쏠했던 그런 작품이었다.

첫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標題作)이기도 한 <로즈 가든>은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미로의 남편 “히로오”의 회상(回想)을 통해서 미로의 여고 시절을 들려준다. 도립고등학교 2학년 같은 반 동급생였지만 결석을 밥 먹듯이 하던 터라 서로의 존재를 잘 모르던 히로오와 미로는 등굣길에 우연히 만나 학교에 가지 말자고 의기투합하지만 빈약한 주머니 사정 탓에 미로의 집으로 가게 된다. 미로에게 같이 자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너무 빠른 진도에 주저하는 히로오에게 미로는 야쿠자 조사원으로 일하는 의붓아버지 “무라노 젠조”와 잠자리를 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말과 함께 그를 아버지 침실로 이끈다. 그 후로 히로오와 미로의 만남은 계속되고, 몇 년 후 히로오는 미로의 어머니 - 무라노 젠조와 미로의 어머니의 만남은 전작인 <물의 잠 재의 꿈>에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 를 못 잊은 나머지 의붓딸인 미로와 잠자리를 한 배덕(背德)한 미로의 아버지를 만나서 미로와 결혼하겠다고 밝히고 미로의 아버지는 의외로 순순히 결혼을 승낙하게 된다. 결혼한 지 몇 년 후 아내에게서 도망치다시피 하여 인도네시아 지사로 부임한 히로오는 오지(奧地)의 마을로 A/S 가던 중 그런 아내와의 만남을 떠올린다. 이처럼 충격적이기까지 한 첫 편이 끝나고 나면 미로의 수사집이라 할 수 있는 단편들이 펼쳐지는 데, 두 번째 단편인 <표류하는 영혼>에서는 미로가 살고 있는 맨션에서 벌어지는 귀신 소동과 그 소동에 숨겨진 사연들을 수사하고, 세 번째 단편인 <혼자 두지 말아요>에서는 우연찮게 한 두 번 스쳐 지나갔던 한 남자가 미모의 중국인 접대부 여성의 사랑을 확인해달라고 의뢰하지만 거절했던 미로가 결국 길거리에서 살해당한 의뢰인의 죽음과 여성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수사에 나서며, 마지막 단편인 <사랑의 터널>에서는 SM 클럽의 에이스 접대부였던 여인이 전철역에서 취객에게 떠밀려 함께 추락사하고, 고인의 집에 남아 있을 클럽 흔적을 없애달라는 아버지의 의뢰를 받아들인 미로가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전작들을 보면서 미로가 결코 정의롭거나 도덕적이지만은 않은, 거기에 허술하기까지 한 캐릭터 -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에서는 자신을 위협하던 AV(Adult Video) 제작사 사장에게 빠져 일을 망쳐버릴 뻔 하기도 한다 - 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첫 편부터 의붓아버지와 잠자리를 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등장하니 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 보니 어머니의 죽음으로 상심한 미로가 어머니를 못 잊어하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에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쯤으로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어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봐도 대부분 진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쯤으로 여기는 것을 보면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라는 반증일 것이다. 미로의 첫남편인 히로오는 이렇게 부도덕하기까지 하고 냉소적인 미로에게 빠져 결국 그녀와 결혼하고,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인도네시아까지 오게 되지만 그녀를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미로에게는 제목인 <로즈 가든>처럼 가시가 있음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손을 갖다대어 피를 흘리고서야 그 아픔과 위험을 알게 되는, 그러면서도 못잊개 하는 위험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두 번째 작품부터가 미로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인데, 특히 미로의 든든한 파트너인 옆집 게이 청년 “도모”는 역시나 반가운 그런 등장이라 할 수 있겠다. 하드보일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거친 액션과 일대 활극이 없어 좀 아쉽지만 - 그러고 보면 전작들도 그렇게 눈에 띄는 활극들은 펼쳐지지 않는다. 이 작품을 하드보일드로 분류하는 것은 액션 씬 들 때문이 아니라 게이, 접대부, SM 클럽 등 도쿄 뒷골목 하류 인생들의 어둡고 음습한 이야기라는 “소재” 때문으로 여겨진다 - 미로 시리즈 특유의 좌충우돌하는 수사과정을 “단편”이라는 압축된 이야기로 만나볼 수 있어 장편 못지 않은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이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장점은 쉽게 부서질 것 만 같은 연약한 여인이지만 실제로는 여느 남자 못지않은 강단(剛斷)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무라노 미로”의 사회적·도덕적 규범과 일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활약이 아닐까? 이번 작품 또한 그 경계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 - 첫 번째 작품에 대한 내 “믿음”이 맞다면 말이다 - 하고 싶다. 너무 환한 대낮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자정 너머의 칠흑같은 어둠도 아닌 새벽이나 황혼 어스름한 시간대의 잿빛 이미지를 자신만의 필치로 절묘하게 그려내는 기리노 나쓰오, 앞으로도 계속 만나보고 싶어질 독특하고 색다른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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