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클라인의 항아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1
오카지마 후타리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不知 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莊子 齊物論篇)
내(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내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구나(장자 제물론편)
범인(凡人)인 나로서는 위의 글귀처럼 피아(彼我)의 구별이 없고 다만 만물의 변화에 불과 하다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가 쉽게 이해될 리가 없겠지만 굳이 미뤄 짐작한다면 “가상현실(假想現實, Virtual Reality)”이 그나마 비슷할 것 같다. 이런 가상현실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로는 어린 시절 보았던 <트론(1982)> - 최근 <트론;새로운 시작(2010)>으로 리메이크되었다 -과 아놀드 슈왈츠제너거 주연의 <토탈 리콜(1990)>, 그리고 가장 유명한 영화라 할 수 있는 <매트릭스 3부작(1999)>와 최근 큰 인기를 얻은 <인셉션(2010)> 등 많은 영화들이 있어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로는 접해본 작품이 드문데, 온라인 게임을 소재로 한 게임 판타지 소설 몇 편과 제1회 한국판타지문학상을 수상했던 “임정”의 <샴발라 전기(북하우스/2000년)> 정도만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이번에 가상현실을 본격적으로 다룬 멋진 SF 미스터리 소설 한 편을 만났다. “오카지마 후타리”의 <클라인의 항아리(원제 クラインの壺 /비채/2011년 8월)>이 바로 그 책이다. 책을 받고서 이제는 흔한 소재인데 뭐 새로운 것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이 씌여진 시점이 아직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조차 정립되기 전인 1989년이라는 점에 놀랐고, 다 읽고 나서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작품인데도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오히려 앞서 언급한 소설이나 영화들 - 위에서 언급한 연도에 발표한 작품으로만 한정한다. 왜냐 하면 영화 <토탈 리콜>의 원작 소설은 1966년에 발표했으니 - 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작품 수준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대학 4학년이면서 취직한 가망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대학생이었던 “나(우에스기)”는 새롭게 창간한 잡지사에서 주최한 어드벤처 게임북 원작 공모에 “브레인 신드롬”이라는 작품을 응모하지만 400자 원고지 200매 응모 공고를 잘못 읽어서 워드프로세스로 친 원고 200매라는 너무 긴 분량을 보내는 바람에 탈락을 하고 만다. 그런데 이 작품을 토대로 “입실론 프로젝트”라는 게임 회사가 가상현실 게임을 제작하고, 나에게 프로토 타입 "K-Ⅰ(클라인 1)"을 테스트해보게 한 후 200만 엔에 계약을 제의하고, 보잘 것 없는 내가 줄곧 원했던 찬란한 미래라는 미끼를 눈 앞에서 흔드는 데 저항할 길 없는 나는 계약을 하고 만다. 그로부터 1년 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게임 개발 완료되기를 기다린 끝에 “K-Ⅱ(클라인 2)" 개발이 끝나고 나에게 게임 테스트 제안이 들어온다. 자신이 스토리를 제공한 게임이 어떤 게임으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한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게임 테스트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 게임,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극한의 현실감이 느껴지는 한마디로 ”물건“이었다. 흥분을 감출 수 없던 나는 점점 게임에 몰입하게 되는데, 테스트가 진행되면서 몇 가지 의문스러운 일들이 벌어진다. 보안 때문이라고 하지만 최첨단 테스트 장소의 위치는 철저하게 통제되고, 게임 진행 과정에서 게임에서 빠져나가라는 알 수 없는 경고와 함께 강제로 게임에서 튕겨 나오는 일이 잦아진다. 거기에 같이 테스트에 참여했던 여학생이 갑자기 테스트를 포기하고 자취를 감춰버리고, 그녀의 친구가 나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어오는 일이 벌어진다. 나는 단순한 게임인줄만 알았던 “K-Ⅱ”와 입실론 프로젝트 사(社)에 뭔가 숨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이 책은 여러모로 참 화제가 많은 책이다. 우선 작가인 “오카지마 후타리”가 한 명이 아니라 플롯과 스토리를 각각 담당하는 2인 공동 필명 - 이처럼 공동 필명으로 유명한 작가가 바로 “엘러리 퀸”이다 - 이고, 둘이 불화를 일으켜 이 작품을 끝으로 결별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제목이자 가상현실 게임 이름인 “클라인”도 뫼비우스 띠와 같은 초입체인 “클라인의 항아리” - 책에는 구체적인 개념 설명이 나오는데 과학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저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그런 입체 모형 정도로만 이해가 된다 - 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현실과 가상세계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이 책의 내용과 주제에 딱 걸 맞는 그런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을, 그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 법 했을 “가상현실”에 대해 지금 봐도 전혀 유치하거나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게 개념 정립해서 제시했다는 점도 충분한 화제꺼리 - 누가 봐도 이 책이 20년 전에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소재나 제목, 작가에 대한 화제성 뿐만 아니라 이야기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고 재미있다. 게임 테스트에 들어가면서 하나 둘씩 의문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고, 동료가 실종되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이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몰입감을 선사하고, 위기가 절정에 치달았다가 해소되어 일견 마무리되는 듯 하지만 놀라운 반전으로 그 여운이 책장을 덮고 나서도 꽤나 오래 지속되게 만드는 추리소설의 전형(典型)을 그대로 보여줘 SF 소설이 아닌 추리소설로도 상당한 수준의 완성도와 재미를 보여준다. 물론 이런 류의 소설과 영화가 지금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어 신선함이나 색다름은 느낄 수 없는 평범한 수준이라고 말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SF와 미스터리(추리)의 절묘하게 결합되어 “1+1=2”라는 단순 결합을 뛰어넘는 재미를 선보이고 있어 즐겨 읽는 두 장르를 한 번에 만나는 재미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던 “선물”과도 같은 책이었다.
다 읽고 나서 결말이 주는 여운에 쉽게 책장을 덮지 못하며 앞서 언급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경지가 이러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책장을 덮고 책꽂이에 꼽아 두면서 저절로 목 뒷덜미를 만져봤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목 뒷덜미에 전선(電線)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전선이 손에 잡혀지고 힘주어 뽑으면 갑자기 “페이드 아웃(Fade-Out)" 되버리고 이상한 캡슐에서 누워 있는 채로 다시 ”페이드 인(Fade-In)" 되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리고는 누군가가 다가와서 게임 어땠냐고 물어볼 것만 같은 그런 상상이 자꾸 들어서였다. 아니면 몇 십 년 후 병상에서 가족들과 인사하고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잠시 후 다시 눈을 떠 보니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가상현실게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허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 또한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게임 속의 캐릭터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게임 캡슐에 누워있을지도 모르는 “그”가 내가 꾸는 꿈 속 캐릭터일까? 어쩌면 21세기식 장자의 호접지몽이 바로 이 “가상현실게임”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외계인 문명 기원설과 같은 음모론(陰謀論)처럼 몇 천 년 전 장자(莊子)가 UFO에 납치되어 가상현실게임을 접해 보고 호접지몽, 물아일체의 경지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까지 비약되자 헛웃음과 함께 생각을 서둘러 지워버리고 책장에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