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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속도 모르면서 - 젊은 작가 8인의 아주 특별한 섹스 판타지
김종광.김도언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8월
평점 :
“식욕(食慾)과 성욕(性慾)은 인간의 본성(食色性也)”이라지만 아직도 “성(性, SEX)"은 대놓고 이야기하기에는 부끄러운, 남이 들을 세라 소리 죽여 소곤소곤 이야기 나누는 그런 주제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8명의 젊은 작가들이 “섹스”를 주제로 펴낸 테마소설집인 <남의 속도 모르면서(김종광, 김도언 등 저 / 문학사상사/2011년 8월)>을 받아들고서 왠지 은밀한 즐거움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저 “젊은 작가 8인의 아주 특별한 섹스 판타지”라는 부제(副題)만으로도 지하철이나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꺼내놓고 읽어서는 안될 것 같은, 문 꼭꼭 걸어 잠그고 혼자 몰래 읽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시작한 이 책, 특별하고 기묘한 판타지임에는 분명하지만 은밀한 즐거움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그런 책이었다.
8명의 작가를 대표해서 “김도언” 작가 - 이 책에서는 “의자야 넌 어디를 만져주면 좋으니”를 썼다 - 는 “작가의 말”에서 먼저 우리들의 섹스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섹스에 대한 명상과 사유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그러기에 매일매일 섹스에 대한 명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섹스의 속성 중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성질, 즉 타자성(他者性)은 언제나 극치의 감정 속에서 교란되는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원하는 존재이며 또한 타자성을 통해 자신의 실존에 걸어둔 암호를 풀고자 하는 존재들인 작가들에게는 당연히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기 힘든 주제이기에 이런 작가들에게 섹스에 대해서 소설을 쓰라는 요구는 마다할 리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소설들이 섹스에 대한 이중성의 그물이 찢어 없어지는 그날까지 우리 사회에서 소설에 대한 진지한 명상과 사유의 계기를 만드는 메신저가 되길 바란다고 마무리한다. 섹스의 속성인 타자성이 작가가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 탐색과 실존 구현이라는 본령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주제라는 말일테다. 물론 이 책에 실려 있는 단편들이 섹스에 대한 이중성의 태도를 허물어뜨리고 진지한 명상과 사유의 계기가 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 은밀한 즐거움과 모처럼 섹스에 대한 진지한 사유을 담았을 것이라는 기대와 괜히 변태스럽거나 난해한 이야기로 읽는데 어렵지나 않을지 하는 걱정을 함께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책에는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8명의 작가의 서로 다른 느낌의 “섹스”에 대한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역시 걱정했던 난해하고 난감한 이야기도 실려 있지만 기발하면서도 뭔가 곱씹을 만한 그런 이야기도 실려 있어 각 편 마다 읽는 맛이 서로 다르게 느껴진다. 단편 중 가장 재미있고 인상 깊은 단편은 첫 편인 김종광의 “섹스낙서상 - 낙서나라 탐방기 4”를 들 수 있겠다. 우리나라 근처 어디 쯤 위치한, 국민의 칠십 퍼센트가 매춘부인 섹스 산업국가 “율려국”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섹스 낙서상”을 소개하는 이 단편에서는 은근히 우리나라 문학상들의 위선을 비꼰다. 노인들의 성을 다룬 영화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2002)>가 연상되었던 조헌용의 “꼴랑”은 개발 여파로 사람들이 떠나버린 갯벌에서 살고 있는 노인 부부의 삶과 사랑을 애처롭게 그리고 있다. 어쩌면 섹스에 대한 판타지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은 지중해의 한 섬에서 일본 AV 여배우를 현실에서 만나 강렬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인 박상의 “모르겠고”라고 할 수 있을 테고,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화학적 거세를 당한 남자 이야기인 은승환의 “배롱나무 아래서”도 사랑과 섹스는 과연 상관관계가 있을까 하고 물어오지만 그 기발한 상상력만으로도 꽤나 재미있게 읽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는 퇴폐업소인 각종 “방(房)”들, 즉 “인형방”, “안마방”, “DVD방” 사업에 참여했던 남자 이야기인 권정현의 “풀코스” 또한 현 섹스 산업의 현실 고발과 함께 그렇게 쉽게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환락의 공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정작 사랑의 대상인 아내와는 단절된 한 남자의 처연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나머지 김도언의 “의자야 넌 어디를 만져주면 좋으니”와 김종은의 “흡혈귀”, 김태용의 “육체 혹은 다가오는 것은 수학인가” 또한 독특하고 기묘하기까지 한 사유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다지 감흥이 없었던, 심지어 난해하기까지 한 그런 단편들이었다.
한편 한편 색깔이 서로 다른 독특한 작품들이고, 몇 몇 작품은 기발함이 번뜩이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작가의 말처럼 섹스에 대한 진진한 명상과 사유를 느끼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그렇다고 은밀한 즐거움도 올곧이 충족(?)시키기에도 어려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책이 되어 버렸다. 다만 금기(禁忌)로만 여기던 “성(性)”에 대한 독특하고 다채로운 시선들을 느껴볼 수 있었다는 점만큼은 색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도 작가의 말처럼 섹스가 더 이상 은밀하게 숨어서 소비되고 이야기 나누는 부끄러움과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성찰과 사유를 통해 떳떳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테마로 우리들에게 다가와주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