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도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4
다나카 요시키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책을 좋아하다 보니 “내 인생 최고의 책 한 권”이라는 질문을 자주 받게 되는데, 제일 먼저 떠오르는 책이 <삼국지(三國志)>이고 두 번째는 바로 “다나카 요시키(田中 芳樹)”의 <은하영웅전설(銀河英雄傳說)>이다. 두 주인공 얀 웬리, 라인하르트와 수많은 등장인물이 엮어가는 영웅담과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쾌한 전쟁 장면들, 전쟁과 정치,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 등 많은 면에서 삼국지에 비견될 정도로 참 매력적인 작품이어서 이 책도 몇 번을 반복 - 을지서적, 서울문화사 두 곳에서 출간되었는데, 출판사 별로 2~3회 정도는 반복해서 읽은 것 같다 - 해서 읽었던, 지금도 스토리와 전쟁 장면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지는 그런 책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창룡전(蒼龍傳)>, <아루스란 전기> 또한 열광하며 읽었으니, 나에게는 지금껏 만나본 일본 작가 중 제일 처음 좋아하게 된,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다나카 요시키 임에는 틀림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작가 프로필을 검색해 봐도 명성에 비해 작품 수가 많지 않다보니 위에서 언급한 작품 들 외에 그의 작품을 만나기가 영 어려운데 - <창룡전>, <아루스란 전기>는 첫 권이 출간된 지 20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완결이 되지 않았고, <은하영웅전설>도 외전(外傳)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국내에 번역된 작품 수도 적어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번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반가운 그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일본 독자들 사이에서는 다나카 요시키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라는 <일곱 도시 이야기(원제 七都市物語/비채/2011년 8월)>이 바로 그 책이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아닌 근 10 여 년 만에 다른 작품으로 만나게 된 다나카 요시키의 책, 서둘러 표지를 넘기고 책에 고개를 파묻기 시작했다. 

서력(西曆) 2088년, 지구는 대전도(Big Falldown)'라는 파국을 맞아 지축이 뒤틀려 북극점과 남극점이 이동하고, 5억 평방킬로미터의 땅에 온갖 재앙에 들이 닥쳐 백억 명의 인류가 죽는 대재앙을 맞게 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91년, 월면(月面) 도시의 생존자들은 지구 표면에 내려와 일곱 개의 도시를 건설해서 각 도시들에게 지구 각 지역을 통치, 지배, 개발을 분담시킨다. 대신 월면 도시의 거주자들은 일곱 도시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항공·항주 기술을 빼앗는, 즉 지상에서 5백 미터 높이에 이르는 비행물체 모두 월면에 설치된 레이저포와 무인 군사위성으로 요격하는 “올림포스 시스템”을 가동시켜 달이 지구를 지배하는 시스템을 완성시킨다. 그런데 서기 2136년 달 뒤편에 떨어진 한 운석에서 검출된 미지의 바이러스에 의해 월면 도시의 모든 주민이 치사성 열병에 감염되어 전멸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나 월면도시의 사람들이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푸스 시스템은 향후 2 백년은 쉬지 않고 작동되는, 즉 월면도시의 지배는 벗어났지만 하늘의 봉인은 풀리지 않은 상황에 처한다. 달력의 날짜가 바뀌어 감에 따라 인구는 증대했고, 남겨진 사람들의 동지적 연대감은 경쟁의식과 타산으로 변질되면서, 군대를 만들어 서로 피를 흘리고 때로는 화해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대전도가 일어난 지 100년이 넘게 흐른 서기 2190년, 일곱 도시들은 저마다의 야욕을 드러내어 다른 도시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고, 이 책은 그런 일곱 도시들의 전쟁사(戰爭史)를 담은 책이다. 

일곱 도시 간에 벌어진 다섯 건의 전쟁을 담은 이 책은 <은하영웅전설>에서 보여줬던 기막히고 변화무쌍한 전략전술(戰略戰術)들과 함께 다나카 요시키 특유의 정치, 사회 등 문명 전반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담아내 무대와 등장인물만 바뀌었을 뿐 <은하영웅전설>의 축약판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대재앙 이후에 월면 도시의 도움으로 재건한 지구의 일곱 도시들, 그러나 인간의 무한한 탐욕만큼은 대재앙 전이나 후나 그대로여서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서로를 물고 뜯고 할퀴기에 이른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자신의 고국에서 축출되어 이웃 나라에 망명했던 독재자의 아들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자신이 의탁한 국가의 힘을 빌어 고국을 침략하고, 또 다른 국가의 독재자는 이웃 국가를 침범했다가 대패(大敗)한 후 돌아와 처남을 포함한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일거에 숙청한다. 다른 여섯 국가는 동맹을 맺어 독재자를 타도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지만 자국 군대의 손실을 최소화하여 발을 빼려는 각국 사령관들 때문에 그만 패배하고 말게 되고, 또 어떤 국가의 사령관 참모는 자신을 반대하는 의원들에게 일침을 가하기 위해 애꿎은 전차 부대를 총알받이로 사지(死地)에 밀어 넣어 몰살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다나카 요시키는 100 여 년 후 미래의 모습을 빌어 오늘날 지구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전쟁의 추악하고 더러운 모습들을 고발하고 철처히 비꼬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이 <은하영웅전설>과 <창룡전>을 한참 집필하던 1987년에 나왔다고 하니, 두 작품에서 보여준 다나카 요시키 특유의 시니컬한 경향을 그대로 담아낸 작품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즉 이 책은 입으로는 온갖 정의와 대의명분을 부르짖지만 결국 전쟁이라는 것이 지배계급 - 여기선 정치인들 - 의 권력과 부에 대한 탐욕에 의해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다나카 요시키식 냉소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을까? 물론 이런 다나카 요시키의 시각을 싹 무시한 채 전쟁 장면 만을 골라 “전쟁 소설”로 읽어봐도 재미있지만 그래도 전쟁 이야기를 통해 지독한 “반전(反戰)”과 비평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다나카 요시키의 의도를 제대로 살려 읽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의미도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은하영웅전설>이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우주 함대들 간의 전쟁 장면이 백미(白眉)이긴 하지만 전쟁에 대한 혐오와 인간의 탐욕에 대한 비판이 배제되었다면 그렇게까지 열광하진 않았을 것이고, <창룡전>이 동양의 대표적 신화인 용왕(龍王)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현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모순과 병리에 대한 비난과 냉소가 담겨있지 않았다면 역시나 그냥 그런 판타지 소설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오랜만에 “다나카 요시키” 다운 작품을 읽었더니 다 읽고 나서도 쉽게 흥분이 가시지 않는다. 독자들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난 “다나카 요시키” 이름 석자 때문에라도 만점을 주고 싶은 그런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를 이렇게 짧은 작품 - 318 페이지 - 로 밖에 만날 수 없다니 너무 아쉽다. 그의 다른 작품 또는 신작이 나올 때까지는 다시 한번 <은하영웅전설>과 <창룡전>, <아루스란 전기>, 그리고 이 작품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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