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空港). 여행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기도 한 이 곳에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공항문에 들어서고 또는 나서기도 한다. 어떤 이는 벼르고 별러왔던 해외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어떤 이는 미지의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서로 다른 이유로 가슴 뛰는 흥분과 불안감을 느낄 수 있을테고, 또는 오랫동안 헤어진 연인들의 반가운 만남의 장소로도, 기약 없는 이별의 장소로도 저마다의 사연들에 따라 기쁨과 슬픔의 장소가 될 공항에는 그래서 수많은 사연들이 함께 공존하는 그런 장소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연들은 비행기 출발과 도착 시간에 맞춰 잠시 동안만 공항에 머무를 뿐 또 다른 곳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렇게 사라진 자리에 금세 또 다른 사연들이 채워지곤 한다. 이처럼 잠시 잠깐 머무르게 되는 사연들이 천재지변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하고 일주일 가까이 공항에 머무르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지게 될까? 김민서의 <에어포트 피크닉(노블마인/2011년 7월)>은 바로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 일주일 넘게 공항에 머무르며 일어나게 되는 “피크닉” 같은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2010년 4월 14일, 아이슬란드 화산이 189 년만에 폭발한다. 초속 300 미터로 분출되는 화산재가 11킬로미터 상공까지 치솟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유럽 전역 항공기들이 이착륙이 금지되는 사상 초유의 항공 대란이 발생한다. 우리나라 인천국제공항에서도 4월 15일 본격적인 유럽행 항공기 지연 사태가 발생했고, 유럽행 항공기를 기다리던 외국인 수백 명이 운항 재개 소식을 기다리며 인천공항에 짐을 풀었다. 이 책은 4월 15일부터 4월 22일까지 일주일 간 공항에서 숙식을 하며 항공기 운항 재개를 기다리는 외국인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책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먼저 어릴적 영국으로 입양되어 청년이 되어 고국인 한국으로 여행 온 “제임스”, 미국 최초의 여자 한인 은행장으로 누구보다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지만 어릴 적 입양 보낸 자신의 아들 나이 또래의 제임스가 계속 눈에 밟혀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엘리자베스 김”, 한국전 참전용사였지만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가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60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은, 자신은 노인이 아닌 전사라고 고집스럽게 강조하는 “해리 게이먼”, 프랑스 괴수 영화 감독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최근 만든 영화가 흥행에 대참패하면서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기욤 그린”과 눈이 번쩍 띄일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가슴속에는 첫 결혼의 쓰디쓴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그의 아내 “헤더 그린”, 그리고 아빠에게 퉁명스럽기만 한, 사실은 애인과의 헤어짐 때문에 남몰래 눈물 흘리는 그의 딸 “줄리엣 그린”, 어렵사리 샤넬 모델 제의를 받았지만 항공 대란으로 중간 기착지인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버린 호주 출신 모델 “크리스티나”, 기욤을 한눈에 알아보고 귀찮을 정도로 그에게 찰싹 붙어 이것저것 질문해대는 영화지망생 “톰”, 그리고 공항 직원으로 이들을 보살펴야 하는, 3년 전에 죽은 자신의 일란성 쌍둥이 언니를 잃은 슬픔 때문에 괴로워하는 “호주” 등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그들이 함께 한 일주일은 단지 비행기 연착에 따른 기다림만의 지루한 시간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한번 씩 돌아보고, 서로 화해하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그런 소중한 시간이 된다. 그래서 일주일후 공항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그들은 유쾌하고 즐거운,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감동적이었던 한바탕 “소풍(피크닉)”의 추억을 저마다 간직하고 새로운 “여행”을 위해 공항문을 나서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앞표지에 있는 작가의 프로필을 여러 번 들춰 보게 되었다. 1985년생, 이제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젊은” 작가가 이토록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따뜻한 시선을 간직하고 있다니 놀라움과 감탄이 절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상실감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그런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연들이 작위적이거나 과장되지 않은, 실제로 일주일간 공항에 머무르며 그곳의 외국인들을 하나하나 직접 인터뷰해서 담아낸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꽤나 사실적이게까지 느껴졌고, 전혀 치유될 것 같지 않은 그들의 상처들이 일주일간 함께 머무르면서 서로 보듬어주고 치유되는 과정 또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운항재개 하루 전 날 제임스와 호주가 데이트하는 장면, 즉 그 둘의 데이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옷을 사 입히고, 뮤지컬 공연 관람을 추천하는 등 “작전”을 꾸미고, 그들의 데이트를 숨어서 지켜보면서 쉽게 가까워지지 못하는 둘의 모습에 안타까워 탄식을 터뜨리기도 하고, 때로는 환호하기도 하는 장면에서는 입가에 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유쾌하고 흐뭇한 장면이었고, 어쩌면 하루 후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없는, 어떤 것도 자세하고 분명히 약속하진 않은 “슬픈” 사랑으로 끝날 수 도 있겠지만 그것이 끝을 예감해서가 아니라 일단 믿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어렵지 않은, 그저 함께할 최적의 시간을 기다리면 그만이라는 그들의 믿음이 꼭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인상적인 대목이었다.
작가는 이처럼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채 떠나고 돌아오는 공항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공항이란 곧 떠나고 돌아오는 곳, 일상을 함축적으로 담은 캔버스다. 특수한 공간에서도 계속되는 보편적인 삶. 사람들은 그 보편적인 삶을 무기로 하루하루 외로움과 맞서 싸우고 있다. 이것은 고요한 일상이자 치열한 전투다. 그리고 그 안에, 진짜 이야기가 있었다. -P.316
떠나고 돌아오는 특수한 공간이지만 그곳에서도 보편적인 삶, 즉 일상은 계속되며 그 안에 진짜 이야기가 있다고 말이다. 작가는 그곳에서 누구나 하나씩 간직하고 있을 일상을 끄집어 내어 우리들에게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일상은 무엇일까?
일상, 시간을 내어 들여다보기엔 한없이 지루해 보이는 풍경, 일상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인식되는 순간에야 그 형태와 의미를 갖는다. (중략). 곧 떠날 사람들, 기다릴 사람들, 기다림에 자신 없는 사람들, 불안한 사람들, 헤어짐 앞에서 믿음을 맹세하는 사람들, 이제까지의 삶과 작별하고 곧 새로운 삶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사람들......바로 인생. - P..316
지루해보이기만 하는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 인식되는 순간 그 형태와 의미를 갖게 되는 “특별함”, 즉 “인생”이 되어버린다는 위의 말처럼 작가는 그런 특별한 인생을 가진 저마다의 이야기의 감동을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항”이라는 무대를 통해서 우리에게 선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쉽게 눈을 떼지 못하고 내쳐 읽게 만드는 재미와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잔잔한 감동을 함께 맛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그녀의 삶(人生)에 대한 따뜻한 성찰과 사랑을 담아내는 후속작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