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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리 맛보고 싶어도 절대 맛봐서는 안 되는 것이 뭐가 있을까? 마약(魔藥)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바로 사람 고기(人肉), 즉 “식인(食人)”일 것이다. 세계 각지의 풍습이나 문화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들을 보면 아직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오지(奧地) 미개한 원주민들에게는 이런 식인풍습이 일부 남아있다고 하고, “사이코 패스(Psychopath) 연쇄살인범이 죽은 시신을 냉장고에 보관해놓고 먹어치웠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례들을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보면 “식인”이 그저 먼 옛날 이야기나 꾸며낸 이야기로 치부해버릴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강력한 “금기(禁忌)”이다 보니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상상(想像)의 소재로는 꽤나 매력적인지 “식인”을 다룬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영화 <한니발(리들리 스콧 감독/2001년작)>에서 주인공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가 사람의 두개골을 열어 뇌를 요리해서 먹는 장면은 본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구토가 치밀어 오를 것 같은 역겹고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번에 만난 아르헨티나 작가 “카를로스 발마세다”의 <식인종의 요리책(원제 Manual Del Canibal / 비채 / 2011년 5월)>도 바로 이런 “식인”을 소재로 한 소설인지라 꽤나 망설이다 읽은 책이다. 역시나 첫 장면부터 끔찍한 사건으로 시작하지만 이 부분만 무사히(?) 넘긴다면 그렇게 끔찍하지 않은, 오히려 독특하면서도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문제의 첫 시작은 이 책의 주인공인 “세사르 롬브르소”가 처음으로 인육 맛을 본 생후 7개월이었을 때를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젖을 빨다가 어머니의 왼쪽 젖꼭지를 잇몸으로 억세게 물어 통째로 뜯어 먹는 이 엽기적인 아기 때문에 어머니는 놀라서 심장마미로 숨지게 된다. 며칠을 어머니의 시체와 보낸 이 아이의 운명 - 표현하기 힘든 끔찍한 일들이 그 며칠 사이에 일어난다 - 은 과연 어떻게 될까? 작가는 이처럼 충격적인 장면을 책 첫머리에 툭 던져 놓아 독자들을 놀라게 하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둥 시치미를 뚝 떼고는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레스토랑 “알마센 부에노스아이레스”, 일명 “알마센” 식당에 대한 역사를 늘어 놓는다. 19세기 말 이탈리아를 떠나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쌍둥이 형제가 1911년 개업한 이 식당은 세워진 지 9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고색창연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리고 전설적인 명성을 꾸준히 이어온 유서 깊은 식당이다. 그러나 쌍둥이 중 형이 개업한지 1년 만에 페스트로 죽고 그 동생 또한 충격에 몇 주 만에 따라 죽게 되면서 쌍둥이 형제의 외삼촌 가족이 식당을 물려받게 되지만 수 차례 주인이 바뀌는 그런 상황을 겪게 된다. 이처럼 지루하기까지 한 알마센 유래가 책 중후반부까지 길게 이어지다가 드디어 “엽기”아기였던 “세사르 롬브르소”가 주방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랑스,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다양한 요리비법을 접목시켜 탄생시킨 전설의 레시피 <남부 해안지역 요리책>를 해독하여 맛을 재현해낸 세사르 롬브르소는 알마센의 '스페셜 디너'에 비밀의 재료 -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 - 로 만들어진 요리를 선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번을 읽다가 멈췄다. 먼저는 앞에서도 언급한 끔찍한 책 첫 장면인데 읽고는 도저히 더 읽지 못할 것 같아 한동안 책을 덮어두었었다. 망설임 끝에 다시 펼쳐든 책, 더는 끔찍한 장면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조마조마한 마음에 읽기 시작했는데, 첫 장면 이후로는 레스토랑 “알마센”의 역사가 지루하게 이어지고, 시점도 과거와 현재를 어지럽게 오고 가서 집중을 할 수 없었으며 각종 요리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서양 요리에 상상력이 빈곤한 탓인지 머릿 속에 요리 이미지를 그려낼 수 없어 결국 다시 덮어버렸다. 그러다가 도대체 자기 어머니를 먹어버린 첫장의 엽기 꼬마는 언제 등장하는거야 하며 처음에는 끔찍해서 싫었지만 오히려 “세사르 롬브르소”의 등장을 기다리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으로 지루한 대목을 건너 뛰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드디어 후반부에 등장한 우리 주인공,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끔찍한 사건으로 시선을 붙들면서 비로소 중간의 지루함은 어느새 말끔히 잊어버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처 읽게 만든다. 정리하자면 처음 놀라움(Shocking), 중간 지루함, 후반 다시 놀라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 소개글에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가 19세기 초 독립을 했지만 끊임없는 혼란과 내전으로 수많은 폭력과 피로 얼룩진 아르헨티나 근 현대사를 모티브로 했다고 하는데 책이 주는 이미지 - 주로 끔찍, 잔혹, 엽기로 요약할 수 있는 - 에 너무 경도(驚倒)된 나머지 그러한 작가의 역사적 인식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까지 깊이 있는 독서를 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쉽게 입에 붙지 않는 스페인식 이름과 지명, 머릿 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 요리 이미지, 낯설기만 아르헨티나 역사 등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식인”이라는 섬뜩하고 강렬한 이미지가 다 읽고 나서도 쉽게 가시지 않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책이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 머릿 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바로 세사르가 선보인, 인육을 주재료로 한 “스페셜 디너”가 과연 어떤 맛일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금세 무슨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결코 쉽게 가시지 않는 그런 궁금증, 앞으로도 이 책을 보면 한번씩은 떠올리게 될,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그 만큼 더 강렬해지는 “그것”의 맛에 대한 궁금증, 결코 맛볼 수 도 맛봐서는 절대 안 되는 “금단(禁斷)”의 맛, 혹 하느님이 금지하신 “선악과(善惡果)”를 결국 따먹었던 “이브(EVE)"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며 책을 책꽂이에 꼽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