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이영수(듀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장르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작가 “듀나”의 이름은 심심찮게 들어왔다.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작품보다도 베일에 가려져 있는 작가의 정체 때문일 것이다. 이메일로만 소통하며 실명과 나이는 물론 남자인지 여자인지, 한 명인지 아니면 작가 집단인지도 확인되지 않은 “신비”로운 작가의 정체 때문인지 자주 다니는 장르소설 동호회에서는 그의 정체를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가 떠돌고 있어서 나또한 저절로 그의 이름(필명)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1994년부터 온라인 활동을 시작했다니 이미 작품 경력이 16년이 넘는 “중견 작가”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그의 작품은 몇몇 장르 작가들의 단편 모음집에 수록된 몇 몇 단편들과 몇몇 매체에서 본 그의 대중문화 비평 글들을 몇 편 읽었을 뿐 본격적인 작품은 이번에 출간된 단편 소설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자음과모음(이룸)/2011년 1월)>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SF 전문작가로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판타지, 공포, SF 등 전(全)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의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력에 꽤나 매력적이면서도 왠지 낯설다는 느낌이 함께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책에서는 총 1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마다 분량의 편차가 있어 어떤 작품은 불과 몇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중편 소설 분량이기도 하다. 분량에 따라 이야기의 구조도 제각각이어서 어떤 작품은 기승전결(起承轉結)이 불분명하여 단지 사건만을 소개하는 정도로 그치고, 어떤 작품은 설정부터 결말까지 마치 장편소설을 축약해놓은 듯한 완벽한 서사(敍事)구조를 담아내고 있기도 해서 각 단편마다 서로 다른 느낌을 들게 한다. 그중 인상 깊었던 작품은 표제작이기도 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동일한 세계관인 “안개 바다”를 들 수 있다. 가까운 미래 어느날 서울과 평양 등 세계 주요 대도시에 미확인물체(UFO)가 착륙한다. 그런데 소설이나 영화에서 흔히 보듯 “지구 정복”이 아니라 이 외계인들은 일정 지역을 확보하여 자신들이 필요한 자원 - 인간도 포함된다 - 을 채취하여 점령 지역을 요새화하고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구역에 접근해도 별다른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 특이한 존재들이다. 인간들은 그들의 우주선을 이용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우주모험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새로운 행성과 차원에 도착한 인간들과 동물들은 행성의 환경에 맞춰 새로운 종(種진)으로 진화(進化) -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서는 인간들이 인간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화하고, “안개 바다”에서는 특이하게도 “개”가 인간형(人間形)으로 변화한다 - 하게 되는데 이러한 진화의 촉발은 바로 우주선이 퍼뜨린 “링커 바이러스”에 의해 이루어진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서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된 국가인 “북한”을 등장시키는데, 평양을 점령한 우주선이 링커 바이러스를 퍼뜨리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오히려 그 폐쇄성 때문에 인근 국가로 퍼지지 않게 되고, 세계가 공조하여 북한 주민들을 배척하고 학살하게 되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결국 외계 행성에서 조우하게 된 남한 출신 주인공과 북한 출신 “빨갱이” - 이데올로기적인 호칭이 아니라 북한 사람들을 부르는 대명사로 설정하고 있다 - 인원들이 생존을 위해 대립하면서 서로 죽고 죽이게 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종(種)”으로 진화하게 된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의 세계관과 설정을 그대로 적용한 <안개바다>에서는 지구의 북극과 남극을 연상시키는, 얼음으로 뒤덮힌 또 다른 외계 행성에서의 진화에 대해 그리고 있는데, 두 작품은 작가가 기획하고 있는 연작소설 중 하나라니 조만간 장편으로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두 작품 외에 지구의 모든 사람이 성서에 나오는 인물 중 최고령인 969년을 살았다고 하는 “므두셀라[Methuselah]”의 이름을 딴 바이러스에 걸리면서 “불사신”이 되고 정부에서 사람들의 업적을 평가하여 수명을 조절 - 공적 살인 형식 - 하는 “음모론”을 다룬 “죽음과 세금”, 작가가 중국(中國) 괴이(怪異) 소설집인 <요재지이(聊齋志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왔던 <전설의 고향>을 연상시키는 “여우골”, 너무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한 나머지 주인까지 살인하게 되는 환경관리 자동 시스템을 그린 “정원사” 등이 재미있었던 작품이었다. 그 외에 짧은 분량의 단편인 “동전마술”,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 등은 소재는 참 기발하지만 사건의 원인이 불명확 - 또는 제공된 정보가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너무 적어서 - 해서 읽다 만 듯 한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게 하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단편 하나하나가 다른 데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색다른 소재를 담고 있어 신선한 매력과 재미를 느끼게 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작가의 상상력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한 탓인지 조금은 낯설음까지 느끼게 하는 그런 책이었다. 감히 평가해본다면 상상력의 기발함과 독특함은 나만의 전작주의(全作主義)의 작가이자 늘 그의 상상력에 경탄하게 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비교해 볼 만 하지만 흡입력과 재미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단편집 하나만으로 듀나의 작품 세계를 올곧이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는 너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검색을 해보니 그의 작품들이 작가 경력만큼 장편, 단편 다양하게 출간되어 있으니 몇 몇 작품들을 더 읽어본 후에나 충분한 이해가 가능할 것 같다. “듀나”적인 상상의 세계, 앞으로도 꽤나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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