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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 더 레코드 - 카메라 불이 꺼지면 시작되는 진짜 방송가 이야기
강승희 지음 / 북폴리오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오래전 인터넷 유머에서 자신이 얼마나 나이 들었는지를 당시 유명했던 아이돌 그룹 멤버를 이름으로 구별해낼 수 있느냐로 판단하는 항목이 있었다. 난 어렵지 않게 구분해 냈는데 - 그당시 질문이 핑클과 SES 구분이었으니^^ 그런데 나도 인기 남성 아이돌 그룹이었던 H.O.T., 젝스 키스, 신화는 영 헷갈렸었다 - 직장 상사는 영 헷갈려서 죄 틀리고는 나이가 들었구나 하고 한탄(?)했더랬다. 그런데 내가 이제 그 나이가 되었는지 요새 대세(大勢)라는 걸(Girl) 그룹들은 팀 이름은 고사하고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 구분해낼 수 가 없다. 리모컨을 누르면 공중파, 케이블 TV 가릴 것 없이 걸 그룹 멤버들이 무리(!)지어 나오는 터라 얼굴은 낯이 익은 친구들이 몇몇 되는데, 저 친구 이름이 뭔지, 속해있는 그룹이 어디인지 영 연결이 되지 않는다. 요즘 중년 남성들이 아이돌 그룹 콘서트에 자주 보인다던데 나도 나이 든 티를 내지 않으려면 그래야 하는 건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처럼 각종 오락 예능 프로그램들의 단골손님들인 걸 그룹들, 화면에서는 방긋방긋 잘도 웃어대서 보는 남심(男心)들을 흔들어버리는 - 그래서 종종 아내들의 눈총을 사는 - 그녀들이 방송 저 뒤편에서는 어떤 모습들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들이 올라오는 인터넷 연예 뉴스 기사들의 홍수 속에서 그녀들의 진짜 속내는 과연 무엇일까? 공중파 및 케이블 TV 현역 방송 작가로 활약 중인 강승희 작가의 <오프 더 레코드(북폴리오/2010년 12월)>는 이처럼 방송 예능 프로그램 속에 감춰진 속살을 풀어내면서도 비밀스럽거나 음흉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재치있고 재미있게 풀어낸 재기발랄한 방송 비화(秘話)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은 범상치(?) 않은 이름의 올해 29살 노처녀 방송 작가 “도라희”의 좌충우돌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한때는 최고 시청률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바닥을 기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방송작가인 도라희는 싸가지를 밥 말아먹은 아이돌 걸 그룹이자 메인 MC “트리플” 때문에 여간 속이 터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분노가 폭발한 라희는 “트리플” 멤버 중 가장 안하무인이던 “마리”의 빰을 때리는 사고를 저질러 궁지에 몰리지만 트리플 소속사 사장과의 묘한 사건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지만 결국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케이블 TV 연예 가십 뉴스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마리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라희의 옥탑방에 어디 의지할 데 하나 없던 마리가 들이닥치고, 하수구에 빠진 어린 고양이를 구하다가 그만 손이 끼여 119를 부르는 해프닝을 벌인 라희를 신문 기사로 올려 난처하게 만든 신문기자이자 같은 건물 반지하방에 사는 “최장호”, 트리플 전직 경호원이자 완도 고아원에서 마리와 같이 자란 남자를 알게 되면서 일은 자꾸만 꼬여간다. 결국 굴지의 연예 기획사 성 접대와 비리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로 커져 버리게 된다.
책의 가장 큰 재미 요소를 꼽아보자면 현역 방송 작가라는 경력답게 생생한 방송 뒷얘기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곤두박질치는 시청률 때문에 유명 아이돌 여가수들을 기용하지만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그녀들 때문에 스탭들 - 특히 방송작가-들이 고생하는 장면은 종종 연예 기사들에서 “톱스타 K, 알고 보니 안하무인”이라는 가십 기사들로 종종 보아온 내용들인데, 직접 이렇게 작가가 털어놓으니 꽤나 생동감있고 현실성이 느껴진다. 특히 무한반복해서 지겹기만 한 케이블 TV 연예 뉴스들이 만들어지는 과정 - 작가가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또는 들은 풍문을 조합하여 “믿거나 말거나” 형식으로 추려내는 각종 추문들로 방송이 이뤄지는 장면 - 은 왜 연예 뉴스들이 천편일률적인지를 잘 설명 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록 방송국 영문 이니셜을 바꾸고 프로그램 제목을 꼬아놓지만 현실의 어느 방송국 어느 프로그램, 어느 연예인인지 짐작 가능케 하는 내용들은 혹시 실제 상황이 아닐까 하는 묘한 상상의 재미까지 느껴지게 만든다.
다만 책 중반 이후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핵심 사건인 연예기획사 노예 계약, 성 접대, 소속사 사장과 여가수의 추문(醜聞) 등 민감한 주제들, 거대 권력인 기획사와의 법적 및 외적- 주로 폭력이 수반되는 법 외적인 방법들 -인 갈등, 성 상납 대상이었던 정치인들의 외압 등 결코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 사건들이 전 연예 매니저의 증언, 갑작스레 심경 변화를 일으킨 멤버들의 인터뷰들로 두루뭉수리 해결되고야 마는 너무 쉽게 해피엔딩으로 결말이 나는 부분은 그냥 수박 겉핥기식인 것 같아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현역 방송작가로서는 깊게 다루기에는 부담될 수 밖에 없어 언론 등을 통해서 잘 알려진 사안들에만 한정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십분 이해가 되긴 하지만 이왕 언급한 사건이라면 조금은 무거워지더라도 제대로 한번 다루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말은 아쉽지만 그래도 책은 그 설정이나 이야기 전개가 흥미로워서 금세 읽히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최근 들어 이런 연예계를 다룬 소설 - 역시 현직 라디오 PD, 신문사 연예 담당 기자의 작품 - 을 여러 권 만났는데 모두 재미있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런 “연예” 관련 소재는 나에게는 꽤나 흥미로운 소재로 받아들여지나 보다. 어쩌면 나와 전혀 다른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경이 나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인터넷에 수없이 올라오는 연예인 기사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래도 유명 연예인스캔들이나 결혼 소식에는 어느새 마우스를 눌러대고, 술자리에서 “카더라” 통신을 안주삼아 떠들어 대는 어쩔 수 없는 “속물(俗物)” 근성 말이다. 그것도 나의 여러 가지 모습 중에 하나라면 솔직히 인정하고 그냥 나 자신에 솔직해져 보는 것은 어떨까? 차라리 그게 덜 음흉스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