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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공 시모다
리처드 바크 지음, 박중서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Le Petit Prince)>와 함께 어린 시절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이 바로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일 것이다. 특히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너무나도 유명한 문구인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연습장이나 교과서 귀퉁이 마다 즐겨 써놓은 구절이며 책상머리 맡에 죄우명처럼 큼직하게 써서 붙여놓았던 그런 구절이었고,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1973) 또한 볼 때 마다 활자를 저렇게 멋진 영상으로 표현해낸 감독의 솜씨에 늘 감탄하곤 했고, 특히 OST 곡인 닐 다이아몬드의 “Be"라는 노래는 따로 녹음을 해놓고 자주 들었을 정도로 좋아했던 노래였다. 그런데 리차드 바크와의 인연은 <갈매기의 꿈> 한 권으로 그쳤다. 원래 작품 수가 많은 작가가 아닐뿐더러 20세기 “고전(古典)”의 반열에까지 오른 <갈매기의 꿈>이 드리운 그늘이 너무 짙어서인지 - 그늘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늘 속 사물은 어둠으로 숨어버린다 - 그의 다른 작품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드디어 그의 다른 작품을 읽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바로 <기계공 시모다(원제 Illustions / 북스토리 / 2011년 1월)>이 그 작품이다. 출간년도가 1977년으로 이미 34년 전의 작품이니 그의 신작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리고 이미 국내에서는 원제인 <Illustions> 그대로 <환상>이란 제목으로 몇 번 출간된 작품이었지만 나로서는 근 20여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움이 앞섰던 그런 작품이었다. 그리고 리처드 바크의 명언으로 종종 인용되던 “애벌레가 세상의 종말이라 부르는 것을, 신은 나비라고 부른다”의 출처가 궁금했었는데 다름 아닌 바로 이 책이어서 오랜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준 그런 책이었다.
작가 본인의 육필(肉筆)로 짐작되는, 마치 성경 구절처럼 느껴지는 현대판 메시아(Messiah)에 대한 글로 시작하는 이 책은 역시 작가 본인 - 이력을 보니 작가는 실제로 미 공군 비행사 출신으로 상업 비행기 조종사로 일하면서 3천 시간 이상 비행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으로 짐작되는 구식 복엽기(複葉機, biplane)를 조종하는 순회 비행사 “리처드”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10분에 3달러를 받고 사람들을 태워주는 걸로 생계를 유지하는 순회 비행사 리처드는 어느 날 자신과 같은 순회비행사인 도널드 시모다를 만난다. 그는 바로 한 때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현대판 “메시아” - 책 도입부의 글이 바로 이 사람의 행적을 묘사한 글이다 - 로 알려진 기계공 시모다였던 것이다! 자신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이 싫어서 스스로 메시아라는 직업(?)을 때려치우고 비행기를 몰면서 여기저기 떠돌던 시모다,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범상치 않은 모습에 끌린 리처드는 그와 동행하게 되고, 시모다에게서 메시아를 위한 매뉴얼이라 할 수 있는, 아무데나 펼쳐 들고 읽으면,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말이 거기 나와 있을 마법의 책인 “메시아 핸드북” - 그렇다고 딱히 정확하게 일러주지 않고 암시적인 말이 나와 리처드는 끝까지 알쏭달쏭해한다 - 까지 건네받게 된다. 시모다는 리처드에게 인생의 참모습과 메시아로서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불구가 된지 오래되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물 위를 걷고 땅을 헤엄치며 하늘의 구름을 사라지게 하는 기적(奇績)을 보여주며 같이 체험하게 된다. 처음에는 뜻 모를 이야기로만 느껴지던 시모다의 가르침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리처드를 서서히 변화시키게 되고, 리처드 본인도 차츰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하게 된 시모다는 시청자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고, 결국 누군가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고 책은 "이 책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은 틀릴지도 모른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에필로그에서 꿈 속에서 시모다를 재회한 리처드는 그에게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는 제의를 받고 <갈매기의 꿈> 이후로 글로 쓸 이야기가 없어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접어두고 책 서두에 등장하는 육필 첫 문구를 쓴다. 결국 꿈 속 - 또는 다른 시공간(視空間) - 에서 만난 시모다의 제의로 이 책을 쓰게 된 셈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이 책에 대한 성격에 대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책을 뭐라 정의할 수 있을까? 줄거리로만 보면 제목 그대로 “환상(Fantasy)" 소설로 볼 수 있겠고, 두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들과 책 속의 책인 <메시아 핸드북> 속의 글귀로 보면 삶에 대한 경구들을 담은 <잠언집> - 어느 독자는 성경에 비견하기도 한다 - 으로 볼 수 도 있고, "깨우침”을 주제로 한 일종의 “영성(靈性)소설” 또는 “구도(求道)소설” 이기도 하며, 어느 외국 독자의 표현대로 “자기계발소설”로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비록 단순한 줄거리와 짧은 분량으로 빠르게 읽히기는 하지만 읽고 나서도 곱씹어 생각해볼 거리가 많아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요약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내 멋대로 헤아려 보자면 이 책은 원제인 “환상(Illusions)"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은 실제가 아닌 ”환상“이며, 환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음 구절이 바로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당신 삶의 모든 사람들,
또 모든 사건들이 거기 있는 까닭은
당신이 그것들을 그리로 끌고 왔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걸로 뭘 할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렇다면 환상과도 같은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강조하지만 이 책에서는 환상을 실재화하는 힘인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리처드는 시모다의 가르침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물 위를 걷고, 땅 속을 헤엄치며, 벽을 통과하는, 그리고 하늘의 구름을 없애는 기적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또한 그러한 상상력으로 항상 자유롭게 마음을 바꿀 수 있고, 다른 미래를, 또는 다른 과거를 선택할 수 있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아마도 다시 읽게 된다면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외국의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마치 리처드가 상황 때마다 <메시아 핸드북>를 펼쳐 보지만 알듯 모를 듯 모호한 표현 때문에 금세 이해가 되지 않고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주제를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다면 <메시아 핸드북>에 등장하는 글귀들만 따로 골라 읽어도 될 만큼 좋은 글귀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지구상에서
당신의 사명이
끝났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시험이 하나 있다.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 삶의 무게에 지쳐 그냥 포기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에게 주어진 사명 - 사명을 준 존재는 “신(神)”과 같은 절대자일 수도, 아니면 내 스스로 나에게 부과한 것일 수 도 있을 것이다 - 을 아직 끝마치지 않았으니 좀 더 힘을 내야겠다는 용기를 주는 글귀로 삼아볼만 하다. 물론 내 멋대로의 해석이기는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책은 전작인 <갈매기의 꿈>처럼 손에 닿기 쉬운 곳에 꼽아 두고 자주 꺼내 읽게 될 그런 책으로 생각된다. 우선 이야기 위주로 읽고 감상을 적었지만 이 책을 같이 읽은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 분들의 서평 또한 꼼꼼히 챙겨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다음에 읽을 때는 책 속 대화와 글귀를 “화두(話頭)” 삼아 곱씹으며 천천히 읽어볼 생각이다. 과연 처음과는 어떻게 다른 느낌을 받게 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