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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즈음은 그다지 챙겨보는 드라마가 없지만 한때 드라마를 즐겨보던 적이 있었다. 연속극이나 미니시리즈 등 장편 드라마들은 회(回)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보는 맛이 쏠쏠하지만 한 회에 기승전결이 다 담겨 있는, 마치 한편의 영화와 같은 주옥같은 단막극들도 꽤나 즐겨 보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TV문학관(KBS)>과 <베스트셀러극장(MBC)> - 후에 <베스트극장>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었다. 지금도 몇 편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인상 깊었던 작품들이 많았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 바로 <곰스크로 가는 기차(베스트극장 578회/2004.9.12.방영)>다. 비교적 최근에 방영하기도 했고 첫 방영 후 케이블 TV에서 몇 차례 방영해서 본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보는 내내 “영월”이나 “목포” 등 우리 지명이 아닌 정체 불명(?)의 지명인 “곰스크”가 도대체 어디이길래 저렇게 남자 주인공 - 인터넷 검색해보니 엄태웅과 채정안이 주연을 맡았단다 - 이 그렇게 가고자 했는지 영 궁금해서 더욱 인상에 남았던 것 같다. 남자 주인공이 가고자 했던 곰스크가 과연 어떤 곳인지, 결국 곰스크로 가게 되었는지가 불분명해서 언젠 한번 책으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원작소설인 <곰스크로 가는 기차(원제 Tee mit Rum/프리츠 오르트만/북인더 갭/2010년 12월)을 읽게 되었다. 드라마가 비교적 책 이야기를 충실하게 담아내서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드라마와는 다른 색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책에서는 표제작인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포함해서 총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곰스크~>가 50여 페이지로 가장 분량이 많고 나머지 단편들은 10 페이지 남짓해서 많아야 40 페이지 내외인데 삽화들도 곁들어져 있어 실제 분량은 더 짧다고 볼 수 있다. 나머지 단편들도 꽤나 인상적인 작품이 몇 편 있지만 <곰스크>가 가장 인상적인지라 이 책을 읽을 다른 독자들에게 판단을 맡기고 여기에서는 곰스크만 언급해보기로 한다.
표제작인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알려진 대로 곰스크로 떠나려는 남자가 결국 아내와 가족 때문에 중간에 주저앉고야 마는 간단한 줄거리이다. 이제 막 결혼한 신혼 부부가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곰스크는 어릴 적 남자가 아버지에게서 자주 들어오던 일종의 “꿈의 도시”라 할 수 있는데, 어릴 적부터 가고 싶다는 열망을 드디어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가게 되면서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곰스크로 가는 여행길 중간 정착지인 작은 마을에 내리게 된 부부는 그만 열차를 놓치고야 만다. 어쩔 수 없이 마을의 유일한 호텔에 머물게 된 부부는 며칠 후 다시 역으로 향하는 데, 차표의 유효기간이 지나 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마을 호텔로 돌아온다. 호텔 주인은 두 부부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대신 임금을 줄 수 없고, 손님들의 팁으로 생활하라고 제안하고 하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마을에 머물게 된다. 남편은 마을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반면 안정적인 생활에 만족하게 된 아내는 곰스크로 가고자 하는 남편이 영 불안하게만 보인다. 드디어 손님들의 팁을 열심히 모아 두 장 티켓을 산 남편은 다시 열차역으로 향하지만 아내가 자신이 일해서 장만한 “안락의자”를 싣고 가야한다고 고집 피우는 바람에 그만 열차를 놓치게 되고, 그 후 다시금 떠날 기회를 잡게 되지만 이번에는 아내의 임신으로 떠나지 못하게 되고 만다. 그리고는 마을 학교의 나이든 선생님을 대신해 학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결국 마을에 주저앉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처럼 곰스크로 향했다가 마을에 눌러앉았던 전임 선생님이 들려주는 “당신은 이미 당신이 원한 삶을 살았다”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그 후 아이를 둘이나 갖게 되고 정원 딸린 집에서 살게 된 남편은 모든 걸 체념하고 마을에 정착하지만 가끔씩 들려오는 곰스크행 열차 소리에 아직도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전임 선생님이 쓰시던 다락방에 올라가 침대에 얼굴을 묻곤 한다.
역시 원작소설도 곰스크가 어떤 곳이어서 그렇게 남자가 가고 싶어 했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예전에 드라마를 보고 나서 한 선배가 역시 여자는 남자 인생에 있어 걸림돌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너스레를 떨어서 웃은 적이 있는데, 표면적으로야 현실에 안주하려는 아내의 만류와 제지가 결국 이상향(理想鄕)이자 로망일 수 있는 남자의 “곰스크” 행을 막은 셈이니 일견 선배의 말도 일리가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결코 길지 않은 삶을 돌이켜 보면 어릴 적 꿈꿔온 이상과 낭만이 나이가 들고 나면 결국 비현실적인 유치한 공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듯이 어쩌면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내 삶 그 자체야 말로 전임 선생님이 주인공에 들려주던 “내가 원했던 그런 삶”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목표를 이루지 못한 실패자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수 도 있지만 말이다. 책에서는 곰스크를 여러 번 갈 수 있을 만큼 돈도 벌고 안정된 삶을 살지만 주인공은 결국 자신을 붙잡은 아내와 자식들을 핑계로 가슴 아파할 뿐 결코 다시 열차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의 삶을 올곧이 지배했던 곰스크란 결국 어떤 구체적인 사물이나 장소가 아니라 그저 마음 속으로만 꿈 꿔볼 수 있는, 상상속의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인공이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해본다. 그래도 젊은 날의 꿈을 결코 잊지 않고 열망하는 주인공이 일견 부럽기도 하다. 대학시절 수많은 밤을 새며 친구들과 고민했던 미래가 결코 지금 모습은 아닐진대 까맣게 잊고 사는 나에 비하면 말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내 삶에 있어서 <곰스크>는 과연 어떤 곳이었는지, 지금은 까맣게 잊고 지내지만 아직도 내 가슴 속에는 <곰스크>로 가는 열망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어느날 그 열망이 가슴 속을 벗어나 간절해진다면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곳을 향해 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여러 생각들로 여운이 오래가던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은 먼 훗날 죽음을 앞에 두고 내 인생을 돌아보는 그런 나이가 되었을 때 다시 한번 읽어봐도 좋을 책일 것 같다. 그때에는 나는 이미 <곰스크>에 와 있다고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