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인 고은규의 <트렁커(뿔(웅진문학에디션)/2010년 11월)>를 받아들고서 뜬금없이 뤽 베송 감독의 영화 <택시 1(1998)>가 떠올랐다. 영화에서는 파리 택시를 운전하는 한국인 젊은 유학생들이 나오는데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한 사람은 트렁크에서 지내면서 24시간 일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한국인을 비하하는 것이라고 인터넷에서 꽤나 논란이 많았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한국을 방문한 뤽 베송 감독이 인터뷰에서 그 당시 우리나라가 “IMF 환란"시절인지라 힘들 수 밖에 없었던 한국 유학생들 - 실제로 그 당시 유학생들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환율 때문에 본국에서 송금이 끊기거나 대폭 줄어 꽤나 고생했었다고 들었다 - 을 다소 코믹스럽게 묘사한 것일 뿐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하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이 책도 그 영화처럼 생계를 위해 차 트렁크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 아닐까 지레짐작을 했었는데, 책 표지에 보니 제목 아래 조그마한 글씨로 "Trunker: 멀쩡한 집 나두고 차 트렁크에서 자는 사람”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고, 표지 삽화로 차 트렁크에 앉아 있는 남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지레짐작한 예상이 전혀 빗나간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까 하는 호기심에 책 첫 페이지를 펼쳐 들었다.  

 유아용품 전문 백화점인 “베이비앤마미” 1층 “달리는 유모차” 코너 매장 직원인 20대 젊은 여성 “이온두”는 특이한 잠 습관이 있다. 바로 멀쩡한 침대에서 자면 백 퍼센트 가위가 눌려 잠을 못 이루고 차 트렁크에서 자는 것.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온두 한 명이 아니라 인터넷 모임인 “슬트모”까지 결성된 것을 보면 한 둘이 아닌 듯 하다. 작가는 주기로 “슬트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슬트모: 슬리핑 트렁커들의 모임. 멀쩡한 집 놔두고 트렁크에서 처자는 인간들. 병명의 원인을 찾는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나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음. 슬트모에 가입한 온라인 회원은 988명. 회원 가입은 기존 회원의 신규 가입 추천에 의해 가능. 비가입 회원까지 감안하면 5000여 명으로 추산함. 그들은 트렁크를 불법 개조하고, 안락한 트렁크를 위한 정보 공유를 활발하게 하고 있음. 

  온두가 잠을 자는 장소는 온두가 살고 있는 “노루귀 아파트” 단지에서 4차선 노루귀 단지에서 4차선 큰길을 건너 좌로 꺾어 300여 미터 정도 걸으면 비포장도로 끝에 있는, 공터 뒤에 있는 노루산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100미터 더 내려가야 하는 다른 사람 눈을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될, 최적의 장소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느 날 아침 트렁크에서 자고 있던 온두는 자신의 알람시계 소리 외에 낯선 핸드폰 알람 소리에 깨서 트렁크 문을 열고 일어나니 자신의 차 맞은편에 주차되어 있는 차 트렁크에서 자신처럼 자고 있다가 일어나는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이곳 공터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이 남자와의 낯선 동거(?)가 이렇게 시작된다. 다음날 밤 어김없이 잠을 자기 위해 자신의 차 트렁크로 온 온두에게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이름”이고 직업은 건물의 균형을 맞추는 “밸런시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기억을 잃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보드 게임 “치킨차차차”를 함께 하자고 제안해온다. 색깔을 기억하고 맞히는 이 보드 게임은 벌칙으로 자신의 과거 추억을 밝히게 하는데, 온두는 연전연승을 하면서 “이름”의 과거를 듣게 된다. 이름은 군인이셨던 아버지에게 남자다움을 강요받지만 어릴 적부터 그런 아버지가 부담되어 어머니와 더욱 가까워지고, 학교 축제에서 여장(女裝)을 했다가 취재 나온 방송 카메라에 잡혀 아버지에게 들켜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한다. 그 후로도 계속되는 폭력과 형제들의 외면에 괴로워하던 이름은 아버지 몰래 피아노를 배우지만 선생님이 이름에게 계속 피아노를 배우게 할 생각으로 여자들 이상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아버지께 말하면서 이성을 잃은 아버지가 가위로 손가락을 잘라내는 엄청난 일을 겪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자신을 변호하던 큰 형마저 자살을 하자 집을 뛰쳐나오게 된 사연을 온두에게 들려준다. 그런데 온두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떠오를 뿐 딱히 이름에게 들려줄만한 이야기가 없어 얼버무리거나 또는 상상으로 지어내서 들려준다. 온두가 과연 자신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소설 또는 자신이 지어낸 것인지 헷갈려하는, 심지어 동료에게 자아가 여럿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조각 조각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 속에는 가족끼리 동반 자살하려던 부모들 틈에서 홀로 살아남아 트렁크에서 발견된 일, 고아가 되어 경찰서에서 맡긴 복지시설인 “들피집(들꽃이 피어나는 집)”에서의 일들, 들피집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남아 버려진 차 트렁크에서 살던 중 자신에게 음료수를 건네주던 낯선 남자에 대한 기억들이 등장한다. “름”과 온두는 이렇게 서로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어느날 자신의 말실수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된 온두는 “름”에게서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가 임종이 다가오면서 자신을 보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경주로 내려가는 길에 같이 다녀오자는 제안을 받고 경주에 함께 내려간다. 잠시 잠깐 얼굴만 보고 나오겠다던 름에게서 먼저 서울로 올라가라는 말을 들은 온두는 혼자 서울로 올라오게 되고, 다른 직장에 취직하여 다니게 된다. 얼마후 다시 공터 트렁크로 돌아온 름에게서 실어증에 걸려 “죽어라” 밖에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말이 결국 “미안하다”라는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이었다는 사연을 듣게 되고, 온두 또한 자신의 과거라고 짐작되던 가족 동반 자살에 대한 신문기사를 름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름에게서 자신이 미쳐 몰랐던 오래전 름과의 인연에 대해 듣게 된다.  

이 책에서 온두와 름이 잠을 자는 “트렁크”는 어떤 의미였을까? 작가는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트렁크가 아니면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들에게 트렁크란 안전을 보장받는 장소였다. 그러나 성인이 된 그들에게 트렁크는 도피와 은폐의 장소가 된다. (중략)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트렁크'를 갖고 있을 것이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소, 그리고 도피와 은폐의 장소. 

사람에게 있어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장소가 바로 “어머니의 뱃속(母胎)”이라고 했던가?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름과 온두에게 사방이 꽉 막혀 있고 어두운 트렁크 속은 상처뿐인 자신의 과거와 단절할 수 있는 공간, 또다시 사람들에 의해 상처받기 싫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버릴 수 있는 공간, 즉 그 과거의 상처와 사람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느 곳보다도 안전한 어머니의 뱃속과도 같은 그런 곳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부모에게 상처받은 두 사람의 아픈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들에서 감정이입이 되어 애잔한 마음이 들더니 마지막 부분에서 트렁크를 벗어나 함께 잠을 자고 깨어나는 장면에서는 작가의 표현대로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이겨냈다는 의미”, 즉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그런 상처도 결국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가 될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종종 잊어먹곤 하는 그런 진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사랑할 그들의 미래를 그려보며 입가에 미소와 함께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그런 잔잔한 감동마저 맛볼 수 있었다. 이번 중앙장편문학상은 공동 수상작인 오수완의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도 읽었는데, 신인작가 답지 않은 내공에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하더니, 이번 작품이 첫 장편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긴 호흡을 놓치지 않고 적절하게 긴장과 이완을 구사하며 기발한 설정과 재미, 그리고 감동까지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적절히 조화롭게 구성해낸 고은규 작가 또한 그 내공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작가로 평가하고 싶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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