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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게 안부를 묻지 마라 - 박해선 詩를 담은 에세이
박해선 지음 / 헤르메스미디어 / 2010년 11월
평점 :
엊그제(11/22)가 절기(節氣)상으로 “소설(小雪)”이었으니 벌써 겨울이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살이가 바빠지니 계절은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의 온도로만 가늠할 뿐 계절의 변화를 모르고 산다. 예전에는 가을이 되면 자주 듣게 되는 가을 노래들, 즉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나 10월 말일이면 수십 번도 더 들었을 이용의 "잊혀진 계절", 바람이 차가워질 때면 역시나 자주 듣게 되는 “찬바람이 불면” 등을 들으면서, 또는 형형색색 물들어가는 도심 가로수나 시골 녘 들판과 산의 풍경들을 보면서 괜한 감상(感傷)에 빠지곤 했었는데 이제는 책상 옆 탁상 달력이 어느새 두 세장 밖에 남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았을 때, 또는 이른 아침 출근 길 공기가 어느새 차갑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나서야 어느새 가을이구나, 그만큼 지금 삶이 얼마나 여유가 없어졌는지, 얼마나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 어느 해보다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서 어느새 그 끝자락마저 사라져버린 11월 어느 날, 잊어 버린 줄 알았던 내 감성(感性)을 자극하는 책 한권을 만났다. 즐겨보던 음악 방송 프로그램 연출자이자 시인인 박해선의 <그리움에게 안부를 묻지마라(헤르메스 미디어/2010년 11월)>이 바로 그 책이다. 짙은 빨간색 표지가 가을 분위기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책 속에 담겨 있는 시와 에세이들은 가슴 속 깊이 잠들어 있던 감성을 올곧이 일깨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을 상념(想念)에 젖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처음 책 소개 글을 대할 때는 오래전 읽었었던 서정윤 시인이나 원태연 시인의 시집들처럼 다분히 감상적인 시어(詩語) - 학창시절 읽었을 때는 시구(詩句)들을 일기장 등에 따로 적어놓고 연애편지 쓸 때 자주 인용했었는데, 지금 읽어보면 낯이 간지러울 정도로 유치하게 느껴진다 - 들로 가득한 그런 시집으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책을 펼쳐 읽어보니 감성적이면서도 삶에 대한 진솔한 단상(斷想)들과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져 그저 가볍게만 읽히지 않는 그런 책이었다. 이런 느낌이 아마도 프롤로그에서 밝힌
나의 의지나 선택과 상관없이 가족과 떨어져 여러 곳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던 일 년 여의 시간. 이글들은 대부분 그 기간에 씌여진 나의 그리움에 대한 기록이다. 그 시간들이 시가 되고 일기가 되고 편지가 되었다.
라는 글처럼 우리에게 털어놓지 못한 작가만의 사연과 감상이 올곧이 책 속의 시와 에세이에 담겼기 때문이라 짐작하며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작가는 바쁘고 힘든 일상에 지쳐 계절의 변화조차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 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한나절 연락도 닿지 않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푹 한숨 자라고 이야기한다.
남의 꿈
남의 눈빛과 셈
다 잊고 그냥
한나절
푹 주무세요 - <그냥 한나절> 中에서
또한 우리의 사랑이 지금 생에서 끝나는 한순간의 사랑이 아니라 다음 생에까지 이어지는 그런 영원한 사랑이 되기를 바라는 애절한 마음을 노래한다.
전생에 서로 미워해서
지금 그대를 사랑하게 된 것이면
이생의 끄트머리에
난 그대를
일부러 미워할 것이다
(중략)
그런 게 아니라면 이 사랑을
다음 생엔 어쩌란 말이냐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 <우리가 이승에서> 中에서
하지만 그렇게 영원하길 바라던 사랑이 끝나게 되었다면, 그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그런 사랑을 두고 떠나야 한다면, 돌아보지 말 것이며 이 책의 제목처럼 그리움에 더 이상 안부를 묻지 말고 그냥 떠나라고 이야기한다.
돌아보지 말라
눈물 난다
세상 그리움에게 더 이상 안부를 묻지 마라
네 뒷모습 보고 있을 그대에게
네 눈빛 다시 보이지 마라
이제 그리움들은 다 잘 있다
너 없이 잘 있다 - <안부>
사랑하는 이가 곁에 없어 가슴 하나 가득 차오르는 외로움은 결국 사랑에 의해 치유될 수 밖에 없으며, 사랑이 외로움을 키우고 외로움이 사랑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라고 말한다.
외로움은 질환이다
약이 소용없는 독한 질환이다
오직 사랑으로만 치유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외로움을 키운다
한없이 외로워하라
그 외로움만이 사랑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다
잠깐 소개한 아름답고 감성적인 시(詩) 외에도 짤막한 에세이들과 시와 글들과 잘 어울리는 사진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작가의 어린 시절 추억과 가족, 그리고 그와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 그리고 삶에 대한 단상들을 과장되지 않고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다. 작가가 아내에게 바치는 ‘하나뿐인 당신. 당신이 나의 종교라오’라는 고백을 읽으며, 사랑은 그저 가슴 속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낼 때 비로소 그 모습을 온전히 갖게 된다는 오래전 어느 수필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친구에게, 부모님께, 나를 아끼고 격려하는 소중한 인연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나와 그런 인연을 맺게 될 그 누구들에게 멋쩍어서 들려 주지 못했던 말을 가만히 말해본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 앞에서 좀 더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사랑합니다”

오랜만에 대하는 감성적인 글들이라 처음에는 쉽게 몰입되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읽을 수록 조금씩 조금씩 작가의 감성에 동화되어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는 책 속 구절들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아 자꾸 책장을 쓰다듬고 펼쳐보게 되는, 그리고 책에 들어 있는 이소라, 성시경, 이문세 등 그와 함께했던 가수들의 시낭송 CD를 틀어놓고 다시금 책을 펼쳐 읽게 되는, 요란스럽진 않지만 가슴 한 켠을 조용히 물들이는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자꾸만 메말라가는 가슴을 따뜻한 감성으로 채울 수 있었고, 이미 훌쩍 지나가 버렸다 생각했던 2010년 가을 한 자락을 잠시나마 내 곁에 머물게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