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무정 1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 모 스포츠신문에 연재했던 수렵이야기를 꽤나 즐겨 읽었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시베리아, 남미 등 세계 각지의 원시림(原始林)과 밀림(密林)에서 벌어지는 사냥꾼과 맹수들의 쫓고 쫓기는 스릴 넘치는 대결을 그린 이 연재소설은 왠만한 무협소설이나 액션 영화를 능가하는 짜릿한 긴장감과 액션을 선보이고 있어 신문을 계속 읽게 만드는 그런 재미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수렵소설이라 부를만한 별다른 작품을 만나지 못해 아쉬웠는데, 드디어 본격 수렵 소설이라 부를만한 그런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까지 평가받고 있는 소설가 김탁환의 신작 <밀림무정(密林無情/2010년 11월/다산책방>은 이처럼 1940년대 초 조선 최고의 포수와 백두산과 개마고원 일대를 호령했던 백호(白虎)와의 긴박감 넘치는 일생일대의 승부를 다루고 있는데, 개마고원과 백두산을 가로 지르는 장쾌한 스토리와 두 권 합쳐 8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이 무색할 정도로 단숨에 읽게 만드는 재미와 몰입도로 “역시 김탁환!”이라는 탄사가 절로 나오는 그런 소설이었다.   

 일제의 대륙 침공과 수탈이 더욱 심해지던 1940년대 초, 7년 전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대를 지배하는 백호(白虎) "흰머리"에게 포수였던 아버지 "웅"을 잃고 동생인 "수"의 팔마저 잃은 "산"은 복수를 위해 흰머리를 끈질기게 추적하지만 그 또한 턱이 부서지는 중상을 입고 경성(京城)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게 된다. 치료를 마친 "산"은 동생 수에게서 흰머리가 나타났다는 전보를 받고는 열차를 타고 함흥으로 향하게 되고, 열차에서 호랑이를 연구하는 생물학자인 여인 "주홍"을 만나게 된다. 함흥에서 동생을 만난 산은 흰머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 산하 "해수격멸대(害獸擊滅隊)"의 호랑이 사냥에 참여시키기 위한 거짓 전보임을 알게 되고, 군대와 별도로 흰머리 사냥에 나선다. 산은 함흥과 개마고원 일대의 일본군 분초소를 공격한 식인 호랑이가 흰머리의 암컷임을 알게 되고는, 부상 입은 암컷을 미끼로 흰머리를 유인해내지만 주홍의 방해로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게 되고, 동생 수 또한 남은 한 팔 마저 잃게 된다. 산은 격멸대 대장 "히데오"와 주홍,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역시 개마고원 포수인 "쌍해"와 함께 흰머리를 추적하게 된다, 쫓고 쫓기는 긴 여정 중에 산과 주홍은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되고, 산과 주홍의 사랑을 눈치 챈 히데오는 자신 또한 그런 주홍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들의 추적은 그들을 유인하는 듯한 흰머리의 뒤를 쫓아 감당할 수 없는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뚫고 개마고원을 가로질러 백두산에까지 이르고, 산과 흰머리는 백두산 천지(天地)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게 되는데, 아버지의 유품인 엽총 "모신니강"을 놓쳐버린 산은 흰머리의 어깨에 역시 유품인 장도(粧刀)를 꼽게 되지만, 흰머리를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마침내 흰머리는 산을 죽일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는데, 그 순간 눈사태가 흰머리와 산을 덮치게 되고 흰머리는 생포되고야 만다.  생포된 흰머리를 경성으로 후송하여 치료 후 다시 개마고원에 풀어주겠다는 총독의 전언에 히데오는 흰머리를 열차로 수송하게 되고,  흰머리와의 7년간 쫓고 쫓기는 싸움에 종지부를 찍지 못한 산은 열차와 함께 이동하다가 경성에 다다르기 전 열차에서 탈출하고 몰래 경성에 잠입한다.  흰머리는 지금의 창경궁(昌慶宮) 자리에 있던 동물원(창경원)에서 장도 제거 수술을 마치고 일반인들에게 잠시 공개되는데, 이 자리에 모인 조선 백성들은 산신(山神)인 백호(白虎)가 우리에 갖힌 모습을 보고 일제히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폭동을 우려한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진압되게 된다. 그런데 흰머리를 치료하고 다시 개마고원에 풀어주겠다는 총독의 약속은 흰머리를 일본으로 후송한다는 계획으로 바뀌게 되고, 이 계획마저 사실은 부산에서 흰머리를 사살해서  가죽을 벗기려는 속임수임을 알게 된 산은 주홍의 도움으로 흰머리를 구출해내기로 결심하고, 이송 경로에 폭탄을 설치하고 잠복하지만 노름에 빠진 동생 수의 밀고로 그만 함정에 빠지게 된다. 경성 한복판에서 히데오의 일본군들과 일대 활극을 벌인 끝에 흰머리는 탈출하게 되고, 수는 그만 일본군의 총에 의해 사살되고 만다. 탈출한 흰머리는 경성을 벗어나지 않고 여기저기 출몰하다가 조선총독부 돔 옥상에까지 올라가 크게 포효하고, 산은 그런 흰머리가 끝내지 못한 승부를 벌이자고 자신을 불러내기 위한 행동임을 알고 흰머리를 다시 추적한다. 흰머리를 사살하려는 히데오와 일본군이 인왕산을 포위하고 포위망을 옭죄어 오는 가운데, 마침내 인왕산(仁王山) 깊은 골짜기에서 산과 흰머리는 맞닥뜨리게 된다(최종 결말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소개하지 않는다.) 

  이 책은 읽는 내내 고막을 찢을 듯한 호랑이의 포효(咆哮)와 사냥꾼의 거친 숨소리가 귀청을 쩌렁쩌렁 울리는 듯 하고, 눈을 감으면 개마고원과 백두산의 장대한 설경(雪景)이 바로 펼쳐지는 것 같은 착시(錯視)가 느껴지며, 또한 살이 터져나갈 것 같은 혹독한 겨울 추위와 눈보라에 내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생생함이 단연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목숨과 동생의 팔마저 빼앗아간 백호 흰머리를 7년에 걸쳐 목숨을 걸고 추적하는 주인공 산의 광기 어린 집념은 과연 승부가 어떻게 결말지을지 궁금해서 개마고원에서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숨 막히는 추격전을 그린 1권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게 만들고, 2권 초반부 조금은 어이없는 승부 끝에 흰머리가 생포되어 장소가 경성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는 다소 실망스럽기도 하다가 설마 이렇게 결말이 나진 않겠지 하고 책을 계속 붙잡게 되고, 역시나 기대대로 2권 중반을 넘어 흰머리가 산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못 다한 승부를 결말짓자는 흰머리의 신호에 산이 다시 추적하는 장면부터는 다시 호흡이 가빠졌다가 마침내 흰머리와 산이 인왕산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는 흥분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처럼 독자의 호흡을 자유자재로 쥐었다 폈다 하며 읽는 내내 재미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하는 김탁환 작가의 내공은 “15년 동안 소설을 쓰며 쌓은 공력을 모두 쏟아 부었다”는 홍보글처럼 가히 절정을 이루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감탄이 나온다. 역사소설에서 보여주었던 치밀한 고증 또한 이 책에서도 빛을 발하는 데, 이제는 그저 문헌이나 영상으로나 접해볼 수 있는 북녘 땅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대의 자연 풍광과 그 당시의 수렵 방식, 지역 풍속에 대한 묘사는 머리 속에 저절로 확연한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고 세세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작가가 수년간 수많은 역사서와 자료를 수집하고 탐문과 현장답사를 통해 실제 호랑이의 습성과 그 시절 개마고원에 서식했던 표범, 삵, 불곰 같은 맹수들의 생태 등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체득했다는 소개 글을 보면 얼마만큼 이 작품에 작가가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다만 이 책의 결말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드는데 어떤 식으로는 산과 흰머리의 질긴 악연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끝내지 않고 의외의 결말을 보여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지 기회가 된다면 작가에게 꼭 물어보고 싶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있어 출판사 홍보글처럼 “생을 송두리째 걸 만한 목표에 대한 열망, 내 안의 강함을 확인시켜주는 최고의 맞수에 대한 갈망, 의리와 뜨거운 땀으로 뒤범벅된 세계에 한번쯤 몸담고 싶은 로망”이라는 뜨거운 열정이 과연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비록 책과는 시대적·공간적 배경 뿐만 아니라 그 표현 방식과 정도가 전혀 다르겠지만 도심 속 회색 콘크리트 밀림(密林)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삶 그 자체가 바로 전쟁과 같지 않을까? 그 목적이 자신의 야망과 성공을 위해서든, 아니면 자신과 가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든, 아니면 조금은 비현실적인 사회 정의와 도덕을 위해서든 저마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좌절과 도전을 반복하는 그들 가슴 속에는 바로 호랑이의 영혼을 가진 “산”의 집념을 각자의 형상(形狀)대로 하나씩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품고 있는 열정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는 좀 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오랫만에 손에 땀이 절로 나고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재미와 흥분을 만끽하게 하는 멋진 소설을 만났다. 역사 소설가라는 장르적 한계를 벗어나 독특하고 색다른 장르적 실험을 보여줬던 <99; 드라큘라 사진관으로의 초대>에 이어, 아직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 SF 소설 장르에서 멋진 성취를 보여준 <눈먼 시계공>으로 놀라게 하더니, 이제 그 유래를 찾기가 어려웠던 “수렵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완성 - 물론 앞서 소개한 신문 연재 작품이 수렵 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겠지만 그 장르의 완성은 이 작품에 이뤄냈다고 평하고 싶다 - 을 멋지게 이뤄낸, 매 작품마다 놀라운 진화(進化)를 거듭하는 작가의 성취가 과연 어디까지 이르게 될지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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