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원래 여성 작가들의 소설들을 즐겨하지 않았었다. 여성 특유의 감상적(感傷的)인 문체가 별로 와 닿지 않았었고 여성 인권이나 차별 문제에 집착하는 주제의식에도 선뜻 동의 - 어쩌면 나의 몰이해(沒理解)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중견작가인 <님>,<고삐>의 윤정모, <원미동 사람들>의 양귀자,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의 박완서, <숲속의 방>의 강석경 등의 작품들은 챙겨 읽었는데, 그분들 외에는 딱히 참 좋았다 싶을 작품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여성 작가들에게 무관심했었다. 최근 읽은 책 권 수가 많아지면서 20대의 신인 여성작가들 작품도 여러 권 읽을 기회가 생겼었는데, 그녀들의 재기발랄하고 재치 있는 글들에 참 재밌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눈길을 확 끌어당길 정도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이미 데뷔한지가 20년이나 된 중견작가로 그녀가 쓰거나 참여한 책이 50 여권이 검색될 정도로 많은 작품을 선보였으며,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던 “공선옥”의 작품을 이제야 읽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의 여성 작가들 중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5월 광주'를 통찰해온 작가로 알려져 있다”라는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우리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글로써 치유하고자 했던 작가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작년에 선물로 받은 그녀의 작품 <나는 죽지 않겠다>도 오랫동안 그저 책장 한 쪽에 꽂혀 먼지만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그녀의 신작 <영란(뿔/2010년 10월)>로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인터넷 연재를 시작하며 “제 슬픔이든, 남의 슬픔이든, 슬픔을 외면하려는 시선이 팽배한 시대에 나는 슬픔을 가만히 오래, 깊게 바라보고 싶었다. 슬픔 가득한 시선으로, 고요히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 나의 그런 바람을 ‘영란’이 대신 해줄 것이다” 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자식과 남편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 있던 한 여인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 그 상처를 서서히 치유해가는 과정을 과장 없이 담담하게 그려낸 소설로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지는 그런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아들을 물놀이 사고로,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어 버린 "나"는 그 슬픔과 충격에 하루하루를 막걸리와 빵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들어와 살았고, 결혼해서도 계속 살고 있었던 집을 의붓오빠에게서 이제 그만 비워달라는 소리를 듣고는 남아 있는 짐들을 정리하다가 출판사를 꾸려나가던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세를 지급하지 못했던 남편 선배의 친구 "이정섭"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게 된다. 외도로 이혼당하고 아내와 딸을 독일로 보내고 외로움을 앓고 있는 정섭은 그런 "나"가 안쓰러워 친구의 부음을 듣고 급하게 목포로 내려가는 길에 "나"를 데리고 간다. "나"는 정섭의 친구들과 영안실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들과 헤어져 얼떨결에 선착장에 있는 "영란여관"에 하루 묵게 되고, 오갈 데가 없는 "나"를 여관 식구들은 따뜻하게 맞아들여 주고,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던 "나"는 "영란"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 여관에 머무르게 된다. 그 여관에서 영란은 가슴 따뜻한 사람들과 부대껴 살면서 가슴 속 슬픔을 서서히 치유해나가고, 그런 그녀가 좋아 가슴 두근거리던 철공소 젊은 총각 "완규"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직 가슴 속에 묻어둔 남편과 아이에 대한 슬픔이 가시지 않은 그녀는 결국 완규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관을 떠나게 되지만, 죽은 자신의 아이 또래인 완규의 조카가 영 눈에 밟혀서 조카가 다니는 초등학교 근처 슈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한편 장례식 후 서울로 혼자 돌아간 정섭은 여행 서적을 써달라는 출판사의 제의를 받고 영란이 못내 걱정되어 책의 첫 소개 도시를 목포로 정하고 내려와 살게 되고, 정성 또한 한없이 따뜻한 주변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서서히 치유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머물렀던 영란여관 식구들과 완규 등을 만나지만 그들이 말하는 서울 사람이 영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책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영란은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가 버린 슈퍼 주인 "인자"의 치매 걸린 어머니를 보살피게 되면서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고, 
남자에게 버림받았지만 모질지 못하고 치매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인자가 어딘지 자신과 비슷한 그런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마음을 연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엄마랑 내가 독하지 못한 것이 그렇게 아쉽고 속상하드라고. 근데, 이제 안 그래. 안 그런당게. 울 엄마가 그래도 참 좋게 살아왔구나. 한 번쯤, 독한 맘먹고 험한 말이라도 한번 하고 패악질이라고 해도 좋고 하여간. 악이라도 한번 써봤으면 싶다가도, 결국은 아무한테도 해 끼치지 않은 우리 엄마가 잘 살았구나 싶어. 나도 다른 누구보다 나를 원망하고 살았는데, 이젠, 내가 그래도 잘 살았구나, 싶은 게, 내가 남한테 당하긴 했어도 남한테 해 끼친 것은 없구나, 싶어서, 내가 바보 같긴 해도 참 고운 사람이다, 생각하기로 했지. 그러니까, 그제사 내가 나한테 고맙고 네가 막 이뻐지고......그러더라고." - P.200

그리고 다시 한번 남자를 따라 집을 나섰지만 새 생명을 배에 품고 돌아온 인자를 보면서 생명이 주는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고는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는 인자가 가졌는데 내가 힘이 나는 이유를. 그러나 나는 또 알고 있었다. 그것이 생명이 가진 힘임을. 생명은 태동할 때도 눈물겹고 살아갈 때도 눈물겹고 소멸할 때도 눈물겹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눈물로 이루어져 있는 지도 모른다. 눈물이 없이는, 그 어떤 생명도 생겨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고 소멸되지 않을 것 같다. 복숭아 꽃잎이 뚝 떨어져 내릴 때, 화들짝 놀라는 것이 실은 눈물이 출렁하는 순간임을 나는 알겠다. 바람이 건듯 불 때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실은 내 눈물이 흩날리는 순간임을. 내 사람들이 남긴 눈물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듯이, 인자의 배 속에 둥지를 튼 생명을 이룬 눈물이 인자에게 살아갈 힘을 줄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P.261

 영란과 인자는 슈퍼 자리에 음식점을 내고, 서울로 돌아갔다가 목포에 다시 내려온 정섭은 자신의 집 주변에 음식을 맛있게 하는 식당이 있으니 같이 가자는 친구와 함께 영란이 운영하는 가게로 향하면서 책은 끝을 맺는다. 

  작가는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이 이야기는 한 슬픔의 사람이 어떻게 슬픔을 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가에 관한 것이며 '지금 슬픈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내치지 않고 외면하지 말며, 슬픔을 방치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제는 슬픔을 돌볼 시간이며 슬픔을 돌보는 동안 더 깊고 더 따스하고 더 고운 마음의 눈을 얻게 된다면, 그리하여 더욱 아름답고 더욱 굳건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슬픔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사람으로서, 많이 기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책에서는 영란과 정섭의 가슴 속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장소를 "목포"로 설정하고 있는데, 작가는 그 장소가 어느 곳이라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슬픔의 사람 - 작가 본인일 수 도, 아니면 작품 속 정섭과 영란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에게 그 따스한 품을 내준 목포가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서로가 어울려 참 많은 사랑을 만나고 헤어지는 데 연애소설 속에나 볼 법한 그런 거창하고 구구절절한 사랑이 아니라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그런 사랑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특히 짝사랑하던 남자가 떠나 눈물 흘리는 딸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딸의 처지가 가엾어 소리없이 눈물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참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런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또한 5월 광주를 화두로 삼아 우리 시대의 상실과 아픔을 그려온 그녀의 사회 인식도 영란과 정섭의 첫 만남 장소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광화문 분향소였고 연이어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와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부자감세에 대한 다음 대화를 통해서 엿볼 수가 있었다. 

"대중들이 무력한 현실을 신파성 노래에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그럼 넌 어떡해야 한다고 생각하냐?"
"부자들이 세금 많이 내야지."
전혀 엉뚱하다 싶은 해결책을 내놓는다.
"부자들이 세금 많이 내면 되는 거냐? 그뿐이야?"
"있는 놈들한테 돈 많이 걷고 걷은 돈 어만 데다 쓰지 말고 제대로 쓰면 된당게. 그래야 노래도 좀 다양하게 나올 거고, 우리들 정서도 좀 다양해질 거고, 기부도 잘하지 않느냐고? 쌩쑈 하느라 자빠지지 말고 세금이나 잘 내라고 허씨요. 그래야, 우리 같은 가난뱅이도 음악회 같은데도 구경 가고 할 거 아냐." -p.211 

참 좋은 작품을 만났다. 여성 작가라면 즐겨하지 않았던 터라 별 기대 없이 읽어서 더 큰 감동을 받았을 수 도 있었겠지만, 영란과 정섭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읽으면서 어느새 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가슴 속 깊은 상처가 함께 치유되는 것 같은 그런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결국 이 세상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는 없음을,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임을, 아직도 우리 곁에는 비록 가진 것이 없더라도 따뜻한 사랑을 한없이 나눠줄 수 있는, 어쩌면 혈육보다도 더 살가운 그런 "부자" 이웃이 살아가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목포"에 꼭 가보고 싶어졌다.  목포는 고등학교 시절 제주도로 수학여행가면서 잠깐 들려보고는 그 후로 한 번도 가보질 못했는데 지금 가게 되면 선착장 근처의 "영란여관" - 책에서는 나중에 없어졌지만 - 근처에는 아직도 시(詩)를 쓰며 아버지와 조카와 살고 있을 "완규"를,  유달산 산동네 마을에서는 아코디언과 풍금을 멋지게 연주하며 말 못하는 딸과 살아가는 할아버지를,  그리고 목포 도심 어느 초등학교 근처 골목에서는 맛집으로 소문난 영란의 식당 또한 만나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술만 취하면 "목포는 항구다!"하고 소리 질렀던 대학시절 하숙집에서 같이 뒹굴었던, 만나본지 벌써 오래된 그리운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 덕분에 목포는 이름만 들어도 절로 흐뭇하고 가슴 따뜻해지는 그런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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