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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천사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지금 당장 이름이 생각나는 일본 작가가 10여 명이 넘는 것을 보면 일본 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덩달아 나도 참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책들을 접해본 것 같다. 그중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작가를 하나 꼽아본다면 누굴까 하고 생각을 해보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바로 “아사다 지로(淺田次郞)”이다. 그의 작품은 <칼에 지다>,<사고루 기담>,<철도원>,<슬프고 무섭고 아련한>등 네 편을 읽어 봤는데 모두 다 읽고 나서도 쉽게 가시지 않은 여운에 책을 바로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그의 글은 솔직히 편하게 읽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참 불편하게 만든다. 그의 책을 펼쳐 들면 책 첫머리부터 가슴이 아려오는 것이 읽는 내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한 자리에서 꼼짝없이 벌을 서야 하고, 다 읽고 나서도 조용히 물들어 오는 아련한 슬픔에 한 참을 멍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나에게는 쉽게 손이 가지 않는 그런 작가이기도 한 것 같다. 이번에 만난 그의 단편집 <저녁놀 천사(원제 夕映え天使/노블마인/2010년 5월)>도 이 책을 읽으면 분명히 가슴 아플 것을 알기에 받고 서도 한참을 책장에 꼽아두고 몇 번을 꺼냈다 다시 꼽아두게 되었던, 결국 망설임 끝에 읽고 나서는 역시나 가슴이 아파오고 멍한 기분에 휩싸이게 한 그런 책이었다.
책에는 아사다 지로 아니면 누가 과연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까 싶은, "아사다 지로 다운"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저녁놀 천사>는 쇠락해가는 도쿄 뒷 골목 시장 작은 라면집에 찾아온 어느 여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팔십 세가 넘는 노인과 중년의 아들 “이치로”, 두 홀아비가 운영하는 작은 라면집 “쇼와 식당”에 재작년 여름 초라한 행색의 한 여인인 “준코”가 찾아와 의탁하게 된다. 아버지는 그녀를 홀로 사는 아들의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하고, 아들 또한 가슴 한 켠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하지만 그녀는 6개월 지난 새해 벽두에 쪽지 한 장 남겨놓지 않고 잘 있으라는 인사 한마디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그로부터 일년 후 왠지 헛헛한 정월 연휴를 보내던 중 아들은 지난해 11월 30일 발견한 신원불명자의 시체에서 쇼와 식당의 성냥이 발견되었으니 경찰서로 와서 신원을 확인해달라는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경찰이 들려주는 인상착의가 바로 사라지기 전 “준코”의 모습임을 알게 된 아들은 아버지께는 고등학교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에 빠져 병문안 간다고 거짓말로 둘러대고 경찰서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녀를 아는 또다른 남자를 만난다.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를 함께 타고 돌아가던 이치로와 그 남자는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놀을 보면서 마치 천사같았던 그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마치 최민식 주연의 영화 "파이란"의 원작소설이었던 <러브레터>가 오버랩되는 이 단편으로 인해 누워서 읽기 시작했던 자세가 어느새 똑바로 앉게 되고, 그러고 두 시간 넘게 화장실 한번 가지 못하고 나머지 단편, 즉 부모가 이혼한 뒤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년 히로시의 이야기인 <차표>, 정년을 맞이한 회사원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하루를 담은 <특별한 하루>, 역시 정년을 앞두고 강제 휴가를 떠나 여기저기 여행하는 노년의 형사 이야기인 <호박(琥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던 하얀 집의 소녀와 자신의 친구와의 만남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언덕 위의 하얀 집>, 훈련 중 깊은 한속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남자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나무바다의 사람>을 내처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 여운에 앉은 자세를 풀지 못하고 멍하니 책 표지와 안의 페이지들을 들여다 보다가 발끝이 저려오는 걸 느끼고서야 그만 자세를 풀게 되었다. 한 편 한 편이 참 잘 쓴 글들이라 딱히 어느 것이 뛰어나다를 말할 순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저녁놀 천사>와 <차표>가 가장 좋았고, <특별한 하루>의 반전도 왠지 그답지는 않지만 꽤나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다만 자전적 소설이라는 <나무바다의 사람>은 괴이하기까지 한 이야기로 결말이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역시 그다운 글솜씨를 맛볼 수 있는 그런 작품이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아사다 지로가 벌써 머리가 반 이상 빠지고 귀밑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60세의 노년의 나이에 접어 들었다니 그런 분이 이렇게 가슴 한 켠이 뻐근해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의 마음을 여느 여성작가나 젊은 작가 이상으로 섬세하면서도 감성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지 영 믿겨지지가 않는다. 그가 요미우리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했다는
“그런 변화는 내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겠죠. 왈칵 감동하는 작품이 아니라 독자에게 ‘왠지 문득문득 떠오르는 은근한 소설’이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처럼 이 책에 실려 있는 여섯 편의 단편은 눈물을 왈칵 쏟게 만들지는 않지만 다 읽고 나서 쉽사리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 책을 다시금 처음부터 열어보게 만드는, 그리고 앞으로 이 작품을 문득문득 떠올리면 가슴 한 켠이 아파오는 기분을 저절로 느끼게 되는 그런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아사다 지로, 내가 아는 일본 작가들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 평가는 이 작품 때문에라도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 같다. 마음이 불편해질까봐 읽지 않았던 그의 다른 작품들을 하나 하나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