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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들의 귀환 - 1636년 고립된 한 마을에서 벌어진 의문의 연쇄살인사건 ㅣ 꿈꾸는 역사 팩션클럽 3
허수정 지음 / 우원북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하얗게 바랜 사진과 같은 희미한 배경 탓인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와 하늘을 날고 있는 몇 마리의 까마귀가 유독 두드러져 보이는 표지에 불길함과 공포가 확 느껴진다. “1636년, 고립된 한 마을에서 벌어진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이라는 부제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임을 알고 있지만 책을 처음 받아들고서는 이처럼 묘한 분위기의 표지와 “망령들의 귀환(허수정, 우원북스, 2010년 8월)”이라는 제목 때문에 왠지 오컬트적인 공포소설 느낌이 먼저 들었다. 모든 미스터리의 내막이 밝혀지고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에도 여운이 바로 가시지 않고 자꾸 앞 페이지를 들춰보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그런 책이었다.
서기 1636년 병자년(인조 14년), 지난 정묘년(1627년)에 조선을 침략했던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개칭하면서 조선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고 민심은 흉흉해지기 시작한다. 부산 두모포 왜관에서 통역사로 일하는 박명준은 왜관 관수(館守: 왜관의 우두머리) 아들의 석연치 않은 동반자살의 전모에 대한 자신의 추리를 왜관 거상 ‘아베“에게 전한다. 그 자리에서 아베는 명준에게 자신의 수하인 ’오카다 준이치‘를 수행하여 대구 팔공산에 있다는 까마귀 촌에 가서 오카다의 동생을 찾아줄 것을 부탁한다. 명준은 왜인은 왜관을 벗어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아베의 간곡한 부탁에 마지못해 승낙하고, 오카다와 함께 까마귀 마을로 향하게 된다. 명준 일행은 팔공산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길을 물을 겸 들른 주막에서 두달 전 끔찍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까마귀 촌에 대한 흉흉한 소문과 그 마을에는 절대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경고하는 주정뱅이 노인을 만나고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마을이 얼마남지 않은 산 속에서 사위를 분간할 수 없는 폭풍우를 만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승냥이 떼에 습격을 받아 달아 다니지만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게 된다. 눈을 떠보니 어느 낯선 방에 누워있는 것을 알게 된 명준은 그 집의 주인인 ’윤성호‘에게서 사고가 일어난 전날 밤 많은 비로 무너진 곳은 없는지 마을 외곽을 둘러보던 동네 유일의 선비 ’장수봉’과 ‘윤성호’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기절해 있는 그들을 발견해서 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윤성호의 집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던 명준에게 두달 전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을 수사 중이었던, 대구 감영에서 나온 김경덕이 찾아온다. 명준은 괄괄하지만 어딘지 예리한 구석을 보이는 경덕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경덕 또한 명석한 명준과 배짱이 맞아 그를 데리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탐문수사를 한다. 경덕과 함께 마을을 둘러본 명준은 조선의 여느 성황당과는 다른, 마치 일본의 신사(神社)를 연상케 하는 웅장한 성황당, 외지인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주민들, 정신이 이상한 할머니의 영문 모를 이야기, 유독 건장한 청년이 많은 점 등등 까마귀 촌에 대해 심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둘째날 마을에서 또 다른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마을 유력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경덕과 명준은 범인이 마을 촌장의 아들임을 밝혀내지만, 그만 경덕은 광분하여 달려드는 촌장의 아들의 칼에 말릴 틈새도 없이 죽임을 당한다. 경덕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과 슬픔에 명준은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고, 마을에는 모종의 음모의 속삭임이 여기저기서 진행된다. 마침내 임란후 38년동안 숨겨져 왔던 충격적인 마을의 비밀과 사건의 전모가 명준에 의해 밝혀지고 명준은 처음 이 마을 행을 의뢰했던 아베를 찾아가 마지막 진실을 듣는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어쩌면 가장 잔인했고 비참했던 전쟁인 “임진왜란”이 끝난 지 38년이 지났는데도 팔공산 자락 고립된 마을 까마귀 촌에는 그 전쟁의 상흔이 결코 치유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트라우마로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사실과 허구를 조합한 팩션 소설이라기보다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이라고 분류하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책 이야기 전개를 살펴보면 이런 추리소설의 전형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책 초입에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을 먼저 독자에게 제시하고 본격 사건에 돌입하기 전 들려주는 여러 암시들 - 8년전 소동을 벌였다는 까마귀 촌의 내력들과 주막에서의 주모와 낯선 노인네의 경고들 -, 기괴하고 음습한 마을 분위기와 무언가 감추고 있는 기색이 역력한 인물들, 즉 추리소설 특유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과 인물들이 주어지고, 연이어 새로운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인물들이 예측할 수 없는 의외의 행동들을 하게 되면서 사건은 점점 더 미궁에 빠져 들어가고, 주인공격인 탐정 박명준이 실낱같은 실마리를 토대로 결국엔 오랫동안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을 밝혀내면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 점들이 바로 그런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물론 이런 도식적인 전개는 기존의 추리소설과는 크게 다를 것 없는 식상함으로 느껴질 수 도 있다 -. 특히 사건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마을 까마귀 촌에 대한 설정이 탁월한데, 그 음습함과 괴이함 때문에 읽는 내내 마치 그 마을을 직접 돌아다녀보는 것 같은 긴장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그 설정과 묘사가 압권이다. 또한 사건을 추리해내는 박명준의 추리 솜씨도 여느 유명 탐정 못지 않게 명석하고 예리한데, 개인적으로는 중반에 허망하게 죽은 김경덕 - 관리 특유의 오만하고 안하무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명준이 감탄할 정도로 날카로운 감각과 이미 감영해서 포기했는데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남아 위험천만한 마을을 누비는 집요함이 생동감이 느껴질 정도로 입체적인 인물이다 - 과 좀 더 콤비를 이뤘다면 더욱더 재밌지 않았을 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결국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바로 망령의 정체이며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전쟁의 비극적인 단면- 작가 후기에서 전쟁의 후유증으로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의 무심한 눈망울을 담은 사진 한 장 속에서 작가는 전쟁의 참상을 보았닸고 이 책을 쓴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 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책은 일본 추리소설 열풍에 의해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된 한국 추리소설계에서 우리 역사와 우리 인물들을 배경으로도 이처럼 뛰어난 구성과 재미를 보여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여실히 증명해낸 멋진 추리소설이라 평하고 싶다. 이미 전작인 “왕의 밀사”(2008년), “제국의 역습”(2009년)에서 멋진 활약을 보였다는 박명준은 세 번째 활약을 펼친 이번 책에 이어 계속 이어질 듯 한데 출판사 홍보글처럼 셜록 홈즈나 긴다이치 코스케와 같은 멋진 탐정으로 더욱 성장해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