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오브 워터 - 흑인 아들이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황정아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내가 살아온 이야기 구구절절 책으로 엮으면 족히 열 권은 될거여”

명절 때 아들 딸 내외가 모이면 술 한잔 드시고 풀어놓으시는 외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첫머리는 늘 이렇게 시작했다. 그 어느 나라보다 파란만장했던 우리 현대사를 살아오신 분들 중에 구구절절한 사연이나 가슴 속 맺힌 한이 하나씩 간직하신 분이 어찌 우리 외할머니 한 분 뿐은 아니겠지만 저 첫마디 말씀과 함께 밤새 털어놓으시는 외할머니의 이야기는 명절 때마다 할아버지 제사 때마다 수도 없이 들었건만 언제나 들어도 지겹지 않은 그런 이야기였다. 6.25. 피난 길에 길가에서 어머니를 낳으신 이야기, 반동으로 몰려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 미군 제트기가 나타나 폭탄을 떨어뜨려 인민군 죄 죽이는 바람에 살아남았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 그렇게 반대하던 결혼을 하는 바람에 딸 하나 없는 셈 여기려다가 그래도 자식이라고 다시 받아들이게 된 이야기, 어려운 살림에 공장에 나가시며 번 돈으로 기껏 대학 졸업시켰더니만 결혼 1년도 안되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외삼촌 때문에 가슴에 대못이 박힌 이야기 등등 할머니 말대로 사연 하나하나가 어느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더 구구절절한 사연들에 웃기도 울기도 여러 번 하였다. 이처럼 사람들에게는 할머니 말씀대로 책으로 써도 차고 넘칠만한 사연들 하나 둘씩은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완고한 유대인 집안의 딸로 태어나 인종차별이 심했던 1940년대는 상상할 수 도 없었던 흑인과 두번 결혼해서 12남매를 낳아 자식 하나하나 모두 훌륭하게 키워낸 억척 어머니에게는 어떤 기가 막힌 사연이 숨어있을까? 100주 연속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고, 전 세계 20 여개 국에 번역 출간되었으며, 미국 전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재로 채택되었다는 제임스 맥브라이드의 “컬러 오브 워터(부제 흑인 아들이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 도서출판 올, 2010년 8월)”이 바로 그 책이다.  

  책에는 어머니 루스 맥브라이드 조던이 살아온 이야기와 이 책의 저자이자 그녀의 아들인 제임스 맥브라이드의 이야기가 교차로 등장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폴란드 이민자 유대인 랍비의 1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악명 높은 인종 차별주의자들인 KKK단이 버젓이 도로를 활보하던 미국 남부 버지니아주 서픽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유대인 랍비로 흑인들을 대상으로 폭리를 취하는 가게를 운영하던 보수적인 아버지와 비록 반신불수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헌신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는 집이 싫어 도망가 버렸지만 결국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오빠 대신에 가게 일을 도맡아 하면서 아버지의 학대와 핍박, 그리고 유대인마저 멸시의 대상으로 삼는 백인들의 차별 속에서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느덧 장성한 그녀는 마을 흑인과 사랑에 빠져 원치 않던 아이를 갖게 되어 뉴욕에 사는 외갓 댁에서 아이를 지우게 되고, 그녀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그 남자에 대한 실망과 그동안 쌓여왔던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지옥 같던 집을 뛰쳐나와 뉴욕에 정착하게 된다. 뉴욕에서 흑인인 앤드류 맥브라이드를 만나 인종차별이 심했던 그 당시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한 백인과 흑인간의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비록 단칸방이었지만 꿈만 같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면서 여덟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개척 교회를 설립하여 그 누구보다도 성실한 목회 활동을 하던 남편이 그만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과 여덟 명의 남겨진 자식들 때문에 망연자실하지만 곧이어 두 번째 남편 조던을 만나 자녀 넷을 더 두어 12명의 아이들을 키우게 된다. 자신의 아이들 뿐만 아니라 전남편의 아이들까지도 따뜻하게 감싸고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의지가 되었던 두 번째 남편도 결국 사망하면서 그녀의 삶은 더욱 곤궁해지고 힘들어 지지만 흑인 아이들을 둔 백인 여자라는 멸시와 차별 속에서도, 유대인 가족에게 버림받아 의지할 데 하나 없는 외롭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억척스럽게 자녀들을 키워내 열두 자녀 모두를 대학을 마치고 바르고 훌륭한 시민으로 키워낸다. 언제나 자신의 과거라면 입을 굳게 다무시던 어머니를 어렵게 설득하여 이야기를 담아내고 또한 자신의 성장과정을 털어놓는 제임스는 몇 십 년 만에 어머니의 고향 서픽 시로 찾아가 이웃들을 통해서 어머니의 가족들과 친구들에 대해서 듣게 되고, 어린 시절 어머니의 유일한 친구였던 “프랜시스”를 수년 동안 수소문한 끝에 찾아내 어머니와의 감격적인 해후를 주선하게 된다. 

  어찌 보면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라는 절대 가난을 경험했던 우리 윗 세대인 외할머니 세대라면 루스 여사보다 더한 고난과 어려움을 견뎌왔기에 이 책에서의 이야기가 그리 새로울 것도, 그리 감동적일 것도 없겠지만 이 책이 미국에서 그렇게 감동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흑백이라는 인종문제를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살아온 이야기여서 일 것이다. 하느님의 영(靈)은 무슨 색이냐는 물음에 하느님은 물빛이라는, 물은 아무 색도 없다는 어머니의 답변처럼 이 책에는 그 당시에는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흑인도 백인도 그 어느 곳에서도 속할 수 없었던 백인 어머니와 12명의 혼혈 자녀들이 겪게 되는 인종 차별 문제들이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어쩌면 흑인과 결혼한 백인이라는 그 당시에는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밀어 붙이고 남편 둘과 사별하면서 남겨진 12명의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낸 루스 여사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 어느 소설이나 영화보다도 더 기구하고 드라마틱한 그런 이야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루스 여사가 겪어온 기막히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심각하지만은 않게, 때로는 유쾌하게까지 느껴지는데 하루하루가 전쟁 같을 정도로 어질러놓고 말썽을 피워대는 열 두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은 대가족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재미있고 유쾌하다. 특히 이제는 모두 장성해서 사회에서 성공을 했지만, 크리스마스 때마다 좁은 어머니 집으로 모여 복닥대는 루스 여사의 자녀 이야기가 재밌는데, 영화를 보자 밥을 먹자 중구난방 떠들어대다가도 어머니의 한 마디에 금새 조용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그녀가 겪어온 모든 고생이 제대로 보상받게 된 것 같아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루스 여사가 결국 2010년 1월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고 짧게 기록하는 데, 그 어느 누구보다도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던 루스 여사의 삶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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