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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
아카가와 지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7월
평점 :
결혼을 앞둔 미혼남녀들에게 기혼자들 백이면 구십구 꼭 하는 충고가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그냥 혼자서도 살만 하다면 결혼 하지 마라”이다.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확인사살이라도 하는 냥 아이 낳으면 그 다음부터는 좋은 시절 끝난다느니 빚내서 집사놓고는 빚과 이자 갚느라 허리가 휜다느니, 마누라 바가지 때문에 좋아하는 술도 한잔 못하고 왕따가 되었다는 등 자신의 암울한(?) 결혼 생활 사례들을 침을 튀겨가며 상세히 늘어놓고는 이래도 결혼하구 싶냐 하는 표정으로 노려본다. 그래도 결혼하고 싶다 그러면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저것이 직접 경험해봐야 그때 가서 선배 말 들을 껄 후회를 하지 읖조리고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이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저승사자는 뭐하나 몰라 우리 마누라(또는 남편) 안 잡아가고 라는 위험한(?) 소리까지 서슴없이 내뱉는 기혼자들의 푸념들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오늘날 - 물론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 중의 하나가 “결혼”이라는 것을 꼽는 걸 보면 딱히 오늘날에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인류의 역사 이래로 꾸준히 들어왔을 그런 푸념들일테다 - “마누라(또는 남편)가 죽었으면”하는 상상은 어쩌면 귀가 솔깃할 그런 상상일 것이다. 아카가와 지로의 “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살림출판사, 2010년 7월)은 이처럼 결혼한 사람들이라면 ‘마누라 죽이기’라는 상상을 한번쯤은 꿈꿔봤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전제를 바탕으로 그런 상상이 현실에서 착착 이뤄지면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소동을 소재로 한 재밌고 유쾌한, 그러면서도 묘한 감동을 주는 그런 소설이다.
전직 신문기자로 정보 수집과 취재를 담당하는 가게야마, 방송 드라마 작가로 스토리를 담당하는 고지, 실제 집필을 담당하는 소설가 니시모토, 그리고 글을 다듬고 최종 완성을 담당하는 시인 가가와, 이렇게 네 명은 ‘니시코지 도시카즈’라는 필명으로 공동 집필을 하여 몇 몇 작품을 베스트셀러에 올린 유명 작가 그룹이다. 어느날 “마누라 죽이기”라는 발칙한 소재로 그동안의 공동 창작에서 벗어나 각자 이야기를 써보고 그 이야기를 서로 평가해보기로 한다. 인세 수입의 공동 배분 비율을 조정하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돈만 밝히는 아내 때문에 힘든 니시모토, 해외여행과 명품에 빠져있는 아내에게 질려 바람을 피는 가게야마, 혈기왕성한 젊은 아내 때문에 밤이 곤혹스런 가가와, 결혼 사실을 숨기고 아내와 아이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삶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는 가가와, 각자에게는 이처럼 아내를 죽이고 싶은 나름의 이유들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을 소재로 소설을 써나간다. 초안이 완성되고 서로 발표하고 난 후 이야기를 좀 더 다듬고 보완하기로 한 후 그들에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자기들이 작성한 소설 초안 그대로 현실에서 그대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상상과 현실이 뒤죽박죽되어 버린 작가들은 예기치 않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4명이 각자 아내에게 살의를 품게 되는 과정과 소설로 시작되는 마누라 죽이기 시나리오, 그 시나리오가 현실에서 그대로 일어나는 황당하면서도 예측 불허의 흥미진진한 상황 전개,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조금은 뻔한 해피엔딩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이야기를 쥐락펴락 하는 글 솜씨가 정말 예사롭지 않은, 책 읽는 내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재미가 있다. 초반부와 중반부까지는 기발한 미스터리로 출발하지만, 긴박한 사건이 결말에 이르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유쾌하고 즐거운, 그러면서도 묘한 감동과 여운을 주는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로맨스 시트콤을 본 느낌이 들었다. 사실 네 명의 아내 모두 다 악처라 불리울 정도로 못된 아내라기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그런 모습의 아내들이다. 다만 그걸 못 견디어 하고 그녀들을 죽이고 싶다는 발칙한 상상들을 하는 네 명의 남편들이 어쩌면 속 좁고 옹졸한 인간 군상을 대표한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읽으면서 지금 내 곁의 아내는 저 네 명의 아내 중 어디에 해당할까 하며 비교해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처럼 아내를 죽이는 상상은 절대 하지 않고 말이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의 말대로 나는 콩트는 콩트일 뿐 절대 오해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과연 이 책에서 “왜 부인을 죽이고 싶냐고? 결혼하면 알아. 그게 답이야” 라고 말한 대로 모든 결혼한 남성들과 여성들 - 이런 상상이 남성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악처 못지 않게 악부(惡夫)라 불릴 만한 못된 남편들도 많을 테니 -은 자신의 배우자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까? 아마도 대부분 기혼자들은 물어보면 “에이 설마” 하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그러나 말 끝에 감지되는 묘한 여운의 의미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책을 읽은, 또는 읽고 싶은 기혼자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보라. 정말로 자신의 배우자를 죽이고 싶었던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