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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 1
고아라 지음 / 북폴리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 오기 전 원룸의 “주인세대”에서 산 적이 있었다. 주인이 살기 위해 원룸 3개를 합쳐 일반 아파트처럼 방 3개와 부엌, 거실로 꾸민 곳을 말하는, 원룸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한 “주인세대”에 전세로 살았었기 때문에 근처 대학에 다니며 원룸에 살고 있는 대학생들을 많이 만났었다. 어느 날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4층 층계를 걸어 올라왔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집 앞에 하얗고 조그만 고양이 한 마리가 마치 지가 주인인냥 문을 가로막고 앉아서 - 옆에 한 무더기의 그것(!)을 싸놓고 - 나를 꼬나 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집 고양이냐 하고 난감해 하던 차에 출퇴근길에 종종 마주쳤던 아래층 여학생이 고양이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 층으로 헐레벌떡 뛰어 올라와서는 문 앞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나와 고양이를 보고는 얼굴이 사색이 되면서 연신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이유인 즉슨 이 원룸 주인이 강아지며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끔찍이 싫어해서 원룸 계약할 때 애완동물 절대 금지며 발각될시 즉시 퇴거라고 경고를 해서 나를 여주인의 남편으로 오해해서는 쫓겨날까봐 그렇게 사색이 된 거였다. 계속 사과하는 그 학생에게 나도 세 사는 사람이라고 오해를 풀어주니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 학생은 고양이 배설물을 깔끔히 치우고는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는 인사말과 함께 고양이를 안고는 총총 사라져버렸다. 그후로도 그 고양이는 우리 집 문 앞과 층계에서 종종 마주쳤고, 어느 정도 낯이 익었다 생각하는 지 강아지 마냥 나를 종종 따라오는 그 고양이가 귀여워서 몇 번 그 여학생 집에 데려다 주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그 여학생하고도 친해져 자취하는 그 학생에게 반찬도 나눠주고, 방학일 때는 그 고양이를 우리가 맡아줄 정도로 가까워졌었다. 대변을 잘 가린다는 고양이란 말이 무색하게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는 불량 고양이였지만 강아지처럼 나를 잘 따르는 덕분에 애완 동물을 키우는 것을 싫어했던 내가 고양이를 한번 키워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던 고양이 “화이트”-털이 하얀 색이어서 화이트라고 이름 지었단다. 작명센스는 영 아니다^^-와 객지에서의 외로움을 비뚤어지지 않고 고양이를 키우면서 열심히 공부했던 바른 생활 소녀인 그 여학생이 그 집을 이사 나온지 몇 해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그 고양이와 여학생을 꼭 빼닮은 만화책을 최근에 만났다. 네이버 웹툰으로 이미 유명한 고아라의 “어서와(북폴리오, 2010년 6월)”가 바로 그 책이다.

자취를 시작한 여 대학생 솔아는 친구의 부탁으로 고양이 “홍조”를 맡게 된다. 주인에게 잘 안기지도 않고, 방안 여기저기 자신의 분비물을 남기고, 침대나 소파 밑 어두운 곳에 틀여박혀 있는, 전혀 이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홍조”와 동거하면서 전역 후 복학한 친구 두식과 그의 친구인 재선과 만나게 되고, 솔아는 재선과 묘한 관계가 된다. 솔아가 살고 있는 원룸 창가에 낯선 남자가 자주 목격되면서, 남자친구와 동거하고 있지 않냐는 오해를 받게 되는 솔아, 친구라고는 두식 밖에 없는 터라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무시해버리지만 여기저기 주변 인물들에게 낯선 남자가 목격된다. 그 남자는 바로 다름 아닌 고양이 홍조가 사람으로 변신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솔아와 고양이 홍조, 그리고 환한 웃음이 매력적인 남자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전래동화 “우렁각시” - 사실 애묘인들은 내가 키우는 고양이가 사람도 변한다면 하고 상상한다는 데 실제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연상된 것이 "우렁각시였다. 그렇다고 홍조가 솔아가 없는 사이 방을 청소하거나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 변해서 주변에 나타난다는 것 외에는 전혀 닮은 것이 없지만 - 를 연상케 하는 이 만화는 솔직히 만화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별로 매력적이진 않은 작품이다. 손으로 그리다 만 듯 한 그림체, 수채화 물감으로 어설프게 칠해놓은 것 같은 색상, 기존 만화에서 볼 수 있는 네모난 컷이 없어지고 세밀한 배경묘사는 커녕 종종 흰 여백만 보여주는 배경그림, 그리고 다분히 소녀 취향의 스토리 등은 이현세나 허영만 등 기존 작가들의 작품에 익숙한 나로서는 처음에는 영 마땅치가 않았었다. 그러나 책을 넘겨 가면서 어느새 별로라고 느꼈던 작가만의 독특한 그림체에 은근한 매력을 느끼게 되고, 잔잔하면서도 웃음이 묻어나오는 이야기에 점점 빠지게 되었고, 책 중간 중간 등장하는, 인터넷에는 연재되지 않았다는 작가가 키우고 있는 고양이인 “메리", "대구” 이야기나 책 말미에 실린 등장인물 설정배경과 이야기들의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 책을 같이 본 아내도 다 읽고 나서는 전 집에서 만났던 그 여학생과 고양이 “화이트” 바로 그 이야기네 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닮은 이야기에 감정이입이 더 쉽게 되었고, 그만큼 더 재미를 느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를 지금 키우거나 혹은 키워봤던 여성들이라면 한번쯤 꿈꿔봤을 상상과 기대에 부응하는 사랑받을 그런 작품으로 평가받겠지만, 나처럼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은, 만화라면 그저 스포츠나 액션물이 최고지 하는 남자들에게는 조금은 밋밋한 만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1권을 재밌게 읽은 나로써는 솔아가 재선에게 느끼는 묘한 감정들, 솔아의 친구이자 작가의 분신이라는 “알아”와 홍조와의 관계 등 앞으로 있을 러브라인들이 기대가 되는 이 작품의 후속권 또한 역시 기대가 된다. 연재되고 있다는 웹툰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이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을 그 여학생과 고양이 “화이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친구들을 만나면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 그리고 자신들과 닮은 이 만화를 어떻게 생각할지 참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