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사춘기에 막 접어든 중학교 시절, 교생 선생님으로 오셨던 어느 여선생님을 짝사랑한 적이 있었다. 수업 중 나를 쳐다보며 지으시는 선생님의 웃음을 나에게 보내는 사랑의 신호로 착각하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밤마다 선생님과의 결혼을 상상하며 킥킥 웃어대다가 밤잠을 설치곤 했고, 한달 후 떠나시던 선생님을 보면서 얼굴에 눈물 범벅이 되도록 엉엉 울었었고, 가시고 난 후 여러 번 편지를 써서 보내고 답장을 받으면 얼마나 기뻐했던지, 친구들과 선생님의 학교로 찾아가 교문에서 선생님이 나오시길 기다리다가 저 멀리서 나오시는 모습을 보고 누구 하나 뒤쳐질세라 열심히 달려가 선생님의 팔에 매달리고 우리들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어 주시는 선생님의 손길에 어찌나 가슴이 뛰던지.......선생님이 대학 졸업 후 먼 지방으로 발령받으셔서 내려가시고는 소식이 뜸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지만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괜히 가슴 한 켠이 아련해지는 그런 소중한 추억이었다. 지크프리트 렌츠의 “침묵의 시간(사계절, 2010년 3월)”은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아름다운 여선생님과 제자와의 사랑을 차분하고 절제된 감정표현으로 담담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눈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젊은 여선생님인 “슈텔라 페테르젠”의 추모식에서 선생님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19세의 “크리스티안”은 어느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선생님과의 은밀한 사랑을 회상한다. 바닷가 마을의 축제에서 선생님과 춤을 추고, 바다에서 수영 시합도 펼치고, 어느 외딴 섬에 선생님과 같이 갇혀서 첫 키스를 나누고, 호텔에서 선생님과 잠자리를 함께한 짜릿한 추억들, 학교로 돌아와 자신을 차갑게 외면하는 선생님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결근하신 선생님 집을 직접 찾아가서 선생님의 아버지와 만났던 일들, 그녀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다가 친구들을 만나는 가슴 철렁한 순간에도 그녀의 재치로 무사히 위기를 넘겼던 일, 여행 후 돌아오던 날 풍랑에 바다에 빠진 선생님을 구출해내지만 결국 기억을 잃어버리고 끝내 세상을 떠난 그녀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추억한다. 그러고는 “어쩌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침묵 속에 머물러 지켜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라고 독백하면서 선생님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영원한 침묵 속에 가슴 속으로만 간직하기로 결심한다. 

  밋밋하다 느껴질 정도로 최대한 감정표현을 억제하여 담백하게 그려낸 이 책은 선생님과의 애틋하고 절실한 사랑이 구구절절한 사랑 고백과 소리내어 우는 울음보다도 크리스티안이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되어 수없이 되새겨 보게 될 그런 소리 없는 사랑이 더욱 가슴 절절할 수 도 있으며, 꽉 짜여진 스토리보다는 이렇게 여백을 간직한 사랑이야기가 읽은 이들에게 더한 감동과 여운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저기 떠나는 꽃들이 내 젊음의 영원한 비극으로 기억되는 동시에, 상실의 아픔을 보듬는 크나큰 위안이 되리라는 것을” 이라는 크리스티안의 마지막 깨달음처럼 선생님과의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사랑은 크리스티안의 가슴 속에서 때로는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영원한 아픔으로, 때로는 언젠가 그를 다시 한번 가슴 뛰게 할 또 다른 사랑이 찾아와 자리를 양보할 때까지 그럴 위로하고 지켜줄 버팀목으로 그와 함께 호흡할 것이다. 

짧지만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 덕분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풋사랑의 추억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던 행복한 책읽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