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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때론 한 장의 사진이 열 마디 백 마디의 말보다도 더한 진실을 보여줄 때가 있다. 이라크 전쟁에서 두 손과 한쪽 눈을 잃은 9세 소년과 아버지의 모습을 담아 2005년 퓰리처 상을 수상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紙의 “딘 피치모리스”의 흑백 사진은 사담 후세인의 독재 하에 신음하고 있는 이라크 민중들을 구원하기 위해 시작했다는 전쟁이, 그 배후에는 갈수록 고갈되어 가는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이기심이라는 추악한 본성을 폭로하는 그 어떤 르포 기사보다도, 수천 수 만 명이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으로 평생을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 어떤 통계 자료보다도 더 많은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평생을 종군 사진 기자로 참혹한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아왔던 사람은 인생의 뒤안길에서 어떤 감상을 느낄까? 수많은 고서들과 작가들에 대한 언급 및 인용, 빽빽한 각주로 더디게 읽혔던 “뒤마클럽”의 저자이자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라고 불린다는 “아루투로 페레스 레베트레”가 자신의 21년 종군기자 생활을 통해서 겪은 감상을 소재로 한 신작 소설을 내놨다.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시공사, 2010년 4월)”이 그 책이다.
지중해 연안의 어느 섬, 종군 사진 기자였던 안드레스 파울케스는 7개월 째 이곳에서 전쟁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망루의 벽면에 그리고 있다. 전쟁의 순간들과 그 속에서의 죽음을 감정히 철저히 배제된 냉철한 시각으로 포착해낸 사진들로 각종 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종군기자의 삶을 마무리하며, 그가 지난 20 여년 동안 사진 프레임 속에 담아왔지만 어딘가 미진했던 전쟁의 참혹한 진실을 그림으로 오롯이 담아내고자 이 섬에 들어온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식료품을 사러 외출하는 것 외에는 두문불출하던 그에게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온다.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묻는 파울케스에게 그 남자는 자신은 당신이 찍은 한 장의 사진 덕분에 유명해졌고, 그 사진 때문에 자신의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겪었다고 이야기하며 ‘당신을 죽여 버리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참담한 비극을 겪은 한 남자와 렌즈 저 너머의 피사체들에 대하여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그대로의 모습만을 담았던 파울케스의 3일간의 대화를 통해서 둘은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들의 광기에 대해 서로 교감을 느끼고, 파울케스는 마침내 죽는 순간까지도 셔터를 눌러댔던, 그러면서도 결코 공개하지 않았던 연인의 죽음에 대한 대한 비밀을 털어놓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애를 먹었다. 책 도입부 파울케스가 망루의 벽면에 그리고 있다는 전쟁 그림 뿐만 아니라 파울케스가 찍었다는 전쟁 사진들 또한 딱딱한 설명 위주의 지문 만으로는 금새 어떤 이미지일지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딘 책읽기는 파울케스를 찾아온 남자, 마르코비츠가 등장하고 파울케스가 찍었다는 마르코비츠의 사진이 조금씩 머리 속에서 시각화되면서부터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고, 파울케스가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 올비도를 떠올리는 장면부터는 탄력이 붙어 그저 전쟁터에서 사고로 죽은 걸로만 알았던 그녀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을 마르코비츠가 추궁하고 마침내 밝혀지는 장면까지 내처 읽게 되지만, 두 남자의 대화 부문에서 따옴표 없이 독백형식의 지문으로 쓴 글귀들은 대화와 지문을 영 헷갈리게 만들어, 읽은 구절을 다시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 등 읽는 속도를 더디게 하는 불편함이었다. 나만의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책 도입부 모호한 이미지와 책 읽기의 불편함은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다시 벽화 앞에 나란히 선 장면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올곳이 시각화되어 마침내 머리 속에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벽화가 완전한 한편의 그림으로 떠오르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시각 이미지에 집착했던 이유는 사실 두 남자가 3일 동안 나눈 이야기와 회상으로 요약할 수 있는 단순한 소설적 서사 때문일 것이다. 보통 소설은 스토리의 시간적 흐름을 따라 읽으면 되는 데 서사가 단순함을 넘어 부족하기까지 하며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광기라는 어찌보면 무겁고 지루하기까지 한 서사이기도 한 이 독특한 소설은 스토리에 집중을 할 수 없다보니 책에서 소개하는 사진들이나 그림, 과거 회상 장면들에 대한 이미지를 자꾸 떠올리게 만든다. 파울케스가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을 각종 전쟁의 참혹한 모습들이나 그동안 역사 속의 전쟁의 이미지를 외벽에 담는 그림에 대하여 시각화하여 이해할 수 만 있다면 충분히 책에 몰입하여 읽게 되겠지만, 또렷하지 않는 이미지를 그려낼 수 없다면 그저 지루하고 난감하기까지 한 책이라 생각된다. 읽는 내내 모호한 이미지로 애를 먹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또렷한 이미지를 얻었으니 실패하지만은 않은 책읽기였다고 스스로 자평해보지만 그래도 어딘가 부족한 여운이 남는다. 결코 쉽지 않은 이 책, 다 읽고 나서야 시각화되었던 이미지가 피상적인 허상에 불과하지는 않는지, 책에서 언급한 것 처럼 사진 프레임 너머의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잘라버린 건 아닌지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