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시계공 1
김탁환.정재승 지음, 김한민 그림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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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밀한 고증과 독창적인 상상력, 거기에 왕성한 창작활동까지 더해져 역사소설 분야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소설가와 생소한 뇌 공학 분야의 전공자로 최근 대중을 위한 과학 에세이 저술가로도 이름이 알려진 과학자의 만남.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만나서 2년 동안 근 미래인 “2049년 서울”에 대하여 각자가 쓴 글을 수정하고 토론하는, 문학사에 있어 흔하지 않다는 “공동 창작의 시간”을 거쳐 “SF 소설”를 한편 써냈다. 김탁환, 정재승의 공저 “눈 먼 시계공(민음사, 2010년 5월)”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을 대하면서 가진 처음 느낌은 솔직히 기대보다는 우려감이 더 크게 들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두 작가의 이름과 그동안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던 두 작가의 작품 이력만으로도 절로 기대감이 들기도 하지만, 순수문학을 제외한 장르소설을 경원시하는 우리 현실에서 하필(!)이면 영원히 미개척 분야로 남을 것 같은, “아이작 아시모프”나 “아서 C. 클라크” 같은 저명한 작가의 탄생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 뿐 우리에게는 결코 요원할 것만 같은 “SF 소설”에 도전했다는 우려감이 더 컸었던 탓이었다. 과학적 설정에만 너무 집중하면 재미없고 딱딱한 설명 위주의 과학 교과서로 끝나게 될 테고, 재미에만 치중한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다 보면 과학적 배경은 말 그대로 단순한 들러리일 뿐 글로 씌여진 유치한 만화에 불과할 수 도 있는, 과학과 스토리 두 요소의 조화가 두 사람의 토론과 협의로 어느 정도 선까지 가능할지 궁금증과 우려로 시작한 책 읽기는 총 800 페이지에 가까운 많은 분량의 페이지를 모두 읽고 난 후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자랑할 만한 SF 소설이 탄생했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고 읽고 나서도 여운이 계속되는 재미와 감동으로 묘한 흥분마저 느껴진다. 두 작가의 시도가 보란 듯이 성공한 것이다! 

“인간은 한때 모든 신비로운 존재 중 가장 위대한 존재로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우리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신비하지 않다는 확신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 비밀이 이제 풀렸기 때문이다”라는 세계적인 진화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의 문구로 시작하는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39년 후의 미래, 즉 인간의 팔, 다리, 눈, 귀 등의 신체와 장기들을 기계로 대체하고, 가사용 로봇 뿐만 아니라 미혼자들의 성적욕구를 해소하는 배우자 대용 로봇들이 일상화 되어 있고, 이종격투기 시합에 인간을 능가하는 격투 실력을 갖춘 로봇들이 출전하는 등의 모습은 이 소설만의 독창적이고 기발한 그런 미래라고는 볼 수 없는, 그동안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들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던 그런 세계이다. 그러나 책에서는 이러한 과학기술의 결과만을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뇌 공학, 로봇개발, 인공장기 개발 및 이식 기술 등 미래에 현실화되는 주요 기술에 대하여 연대별로 - 물론 2010년 현재 실현되지 않은 가상의 연대지만 - 주요 논문이나 과학 실험들을 단계적으로 소개하는, 마치 2049년 현재의 과학서적을 펼쳐 보면서 읽어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미 역사소설에서 치밀하고 정확한 고증 실력을 선보였던 김탁환의 글 솜씨와 수많은 과학 실험과 이론을 공부해온 정재승의 과학적 추론이 제대로 결합한 결과물로 미래의 역사를 재현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책에서는 연쇄살인사건과 로봇 격투기 시합을 주요 얼개로 삼고 과학기술 발달로 야기되는 여러 문제들, 즉 인간 및 인간성에 대한 의문 - 신체의 70% 이상을 기계로 대체한 사람을 인간과 로봇의 중간개념인 사이보그로 간주해 인권을 박탈 장면, 배우자 로봇에게 인간 그 이상의 애정을 갖게 되는 점 등 -, 돌연변이 생명체까지 만들어 낸 치명적인 환경오염, 정치권력을 능가하는 금권력이 지배하는 세계 등 다소 무거운 주제들도 다루고 있지만 그간의 SF소설의 주 경향인 과학기술에 대한 냉소와 암울한 디스토피아(distopia)적 미래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학 기술이 인간에 줄 수 있는 희망과 절망, 동전의 양면 모두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독특한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쉽게 이해되는 과학적 설득력 - 과학적 소양이 부족한 문과 출신인 나로서는 생소한 용어들과 과학 이론은 영 낯설기만 하지만 여기서 소개되는 각종 과학적 배경이나 장치들은 미래 과학 기술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로서 이러이러한 것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이해되어져도 충분할 것 같다 - 과 묵직한 주제 의식 속에서도 결코 재미를 잃지 않는 탄탄한 스토리 텔링과 함께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모그룹 총수 부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해서 유명세를 탄 로이 리히테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연상시키는 김하민의 삽화이다. 원색 계열의 강렬한 이 삽화들은 마치 외국 작가가 그린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로 이국적인 느낌이 들며, 주요 사건 전개를 글로써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쉽게 연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최첨단 테크놀로지 도시 “2049년 서울특별시”에서 뇌를 적출당한 시체가 연이어 발견되면서 보안청 소속 검사이자 죽은 사람의 뇌 전전두엽에서 가장 최근의 기억을 추출하여 영상으로 재생하는 기술인 “스티머스(Sort-term Memory Retrieval System)”를 사용하여 범인을 체포하는 비밀 수사팀 초대 팀장인 은석범은 수사팀의 비밀이 노출된 걸로 여기고 수사를 진행한다. 한편 세계 로봇 격투기 대회인 “배틀원” 참가를 위해 로봇을 개발해 온 최볼테르 박사는 전초전으로 자신의 로봇 “글라슈트”를 전년도 준우승자 “무사시”와 대결시키지만 무참히 패배하고 극심한 분노를 터뜨리고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앵거 클리닉”에 치료받게 된다. 은석범은 환경운동가인 어머니의 주선으로 “글라슈트” 개발팀 일원이자 뇌공학자인 노민선과 맞선을 보게 되고, 뇌를 적출하는 연쇄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민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살인은 계속되고, 살해당한 사람들이 앵거 클리닉에 참가했던 환자들이였다는 실낱같은 실마리에 앵거클리닉 원장 조윤상을 의심하지만 조 원장마저 살해당하고 만다.  “배틀원”은 성황리에 개최되고 최약체로 지목되었던 “글라슈트”는 힘겹게 승리를 거두면서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었던 “무사시”와 결승전을 치루게 되고, 프로그래밍 되지 않은 이상 행동을 보인 끝에 우승을 차지한다. 우승 기념 파티 식장에서 글라슈트의 공격으로 최볼테르와 은석범은 절체 절명의 위기에 처하지만 노민선이 엽총을 발사한 덕분에 위기를 넘기게 되지만 그만 최 볼테르는 유탄에 맞아 사망하게 되고 동일한 시기에 앵거 클리닉에서 치료받은 모든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진다. 그러나 사건은 은석범이 어머니의 유품에서 발견한 사진 한 장으로 놀라운 반전과 함께 모든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 잔인한 연쇄 살인 사건은 과거의 끔찍했던 사건의 피해자가 간직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나고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증오를 관장하는 뇌의 영역인 인슐라(Insula, 섬), 피각(putamen,조가비핵)에 대해 설명하면서 증오는 삶의 에너지이며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사람은 그 순간 살아갈 이유, 즉 증오를 실현하고 복수하기 위해 계획하고 준비하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게 되며, 오직 인간만이 미움의 순간을 곱씹으며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추억한다고 이야기하며 끝을 맺는다. 

  이처럼 과학적 설득력과 스토리텔링, 멋들어진 삽화 삼박자가 잘 어울린 이 소설은 불모지나 다름없는 SF소설 장르에서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할 만한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 탁월한 수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서로 다른 분야인 소설가와 과학자의 실험적인 시도가 이렇게 성훌륭히 성공을 거둔 만큼 이런 시도가 이번 일회성으로 그치지 말고 앞으로도 SF소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장르로도 이어져 풍성하고 다양한 작품들로 우리를 더욱 즐겁게 해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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