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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라산의 사자들 1
가이 가브리엘 케이 지음, 이병무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J.R.R. 톨킨 이후 최고의 판타지 작가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는 “가이 가브리엘 케이”의 “알라산의 사자들”에 대한 첫 느낌은 두꺼운 양장본의 고전 소설을 연상케 하는 색다름이었다. 한 권으로도 충분한 분량을 큰 활자와 넓은 줄 간격으로 일부러 권수를 늘려 여러 권으로 나누어 출가하는 얄팍한 상술이 대세인 요즘 출판시장에서 80년대 고전 서적을 대하는 것 같은 작은 활자체에 빽빽한 줄 간격, 두꺼운 표지의 양장표지가 오히려 다른 책들과 차별화되는 색다르고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좋아하는 장르인 “역사 판타지” 소설이었지만 900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1권 405 페이지, 2권 489 페이지)에 대한 부담감으로 시작한 책은 불과 이틀 만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오히려 분량이 좀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만드는 재미와 몰입도가 뛰어났다.
이 책의 배경은 현재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와 흡사한 알라산 반도가 배경이다(책 초반 등장하는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출판사 소개 글에도 나와 있듯이 중세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장악한 이슬람 세력과 북부의 카톨릭교 세력, 그리고 유대인들을 연상하게 하는 국가들이 등장한다. 즉, 남쪽에는 사막의 전사들이자 신성한 별을 숭배하는 아샤르 교를 믿는 “알라산” 제국이 위치하고, 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타그라 사막 북쪽인 과거 에스페라냐 제국이 자리 잡고 있던 지역에는 태양신 “야드”교를 믿는 발레도, 루엔다, 알로냐 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두 나라에게서 이단의 취급받는, 하늘의 두 개의 달과 예언의 “고귀한 별들”을 숭배하는 방랑의 민족 킨다트 교인들이 등장한다. 책은 알라산의 마지막 칼리프 “무자파르”가 암살당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무자파르의 죽음으로 칼리프제가 붕괴되면서 15년 동안 알라산은 수많은 도시들과 군주들이 일어섰다 쓰러졌고, 알라산의 북쪽도 야드 교도 왕들이 서로를 상대로 계략을 꾸미고 전쟁을 벌이는 혼란의 시대로 접어든다. 알라산과 발레도 국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 페자나의 푸른 눈이 매력적인 칸디트족 여의사인 예하네는 도시 유력자들이 알라산 지역을 평정한 카르타다 국의 왕자의 초대에 참석했다가 죽임을 당한 “해자(垓字)의 날” 참변에서 우연히 자신의 환자인 비단상인을 구하고, 알라산 남부 카르타다 국의 알말릭 왕의 부인과 태아를 위험한 난산에서 구했지만 오히려 형벌을 당한 자신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비단상인과 함께 페자나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탈출하던 그날 밤 알말릭 왕의 최고 고문관이자 시인인 “아마르 이븐 카이란”과 발레도 왕국의 최고 군인인 “로드리고 벨몬테”와 차례로 만나게 된다. 예히나는 페자나의 동쪽 세라나 호수 근처 도시인 ‘라고사’에서 왕궁의 의사로 정착하게 되고, “해자의 날” 만행을 뒤집어 씌우려는 알말릭 왕을 살해한 후 추방당한 아마르와 역시 발레도 국 재상과의 마찰로 추방당한 벨몬테도 자신의 기사 150명과 함께 라고사로 오게 되면서 세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라고사 궁전에서 아마르와 로드리고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라고사 왕국의 용병으로 같이 근무하면서 산적토벌에 나서면서 서로를 인정하고 진한 우정을 나누게 되고, 예히나는 용병부대의 군의로 참전하면서 두 남자와 우정과 사랑을 쌓게 된다. 라고사에서 카니발이 열리던 밤, 예하네는 아마르와 사랑을 나누지만, 라고사를 비밀리에 방문한 카르타다의 왕 알말릭 2세에 의해 어렸을 때부터 그녀 곁을 지켜온 “아버지”같은 존재이자 집사인 벨라즈를 잃게 된다. 봄이 되어 발레도의 대군이 페자나로 남하하면서 성전(聖戰)은 시작되고 예헤나, 아마르, 로드리고는 페자나로 잠입해 예헤나의 부모님을 구출하게 된다. 발레도의 왕과 로드리고는 아마르에게 동료가 되어 줄 것을 제의하지만 아마르는 단호히 거부하고 둘은 서로의 종교와 국가를 위해 상반되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 로드리고는 발레도국의 대장이 되어 “야드의 기사”들을 지휘하면서 알라산 반도를 정복해 나가고, 아마르는 야드교의 침략에 맞서 알라산 남쪽 남부해협에서 건너온 사막 부족 칼리프 군대의 선봉장이 되어 전쟁에 나서게 된다. 마침내 둘은 서로의 적이 되어 만나고 예하나는 바람 부는 황혼 녘에 언덕에 서서 그 두 사람의 최후의 결전을 지켜본다. 두 사람의 결투의 결과와 마지막 에필로그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 책을 읽을 다른 독자를 위해 밝히지 않도록 한다^^
낯선 인명과 지명으로 몇 번을 1권 앞부분의 “주요 등장인물”과 “지도”를 펼쳐 보게 만들었지만 익숙해지면서부터는 900 페이지의 분량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고 쉽게 읽힌다. 특히 책 중간중간과 마지막 결투장면에서 등장하는 “시(詩)”들은 두 영웅의 우정과 대결, 그리고 그들 사이의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마치 고대 유럽의 영웅 서사시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고전의 맛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가상의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지는 판타지의 매력과 서사적 사건의 전개와 인물들 간의 관계묘사가 탁월한 역사소설 두 가지의 재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 출판사 책 소개 광고나 책 뒷 표지의 광고문구들의 휘황찬란한 찬사가 결코 과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 오랜만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는 그런 소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