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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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테사 모시페그라는 처음 듣는 작가의 작품이다. 1981년 보스턴 출신인 그녀는 첫 장편소설인 <아일린>으로 2016년 펜/헤밍웨이 상을 받았고, 같은 해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1964년 매서운 추위의 12월 말 보스톤 외곽의 작은 도시, 민간 청소년 교정시설에서 비서로 일하는 24세의 아일린이라는 여자가 사라지기 전 일주일간의 이야기를 50년이 흐른 74세의 아일린이 회고하며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알콜중독자, 아무것도 한게 없는 엄마는 아일린이 19살에 죽고 언니는 집을 나가 남자와 동거 중이다. 성장과정에서 예쁘게 생긴 언니와 늘 차별을 당하며 부모로부터 정서적 학대를 당하고 자기도 모르게 심하게 뒤틀린 여자로 자란 아일린. 자기혐오로 똘똘뭉쳐 있어 낮은 자존감으로 남에게 "싫다"고 말도 못하는 반면, 내면은 늘 분노로 들끓고 있어 마치 '살인자' 같다고 한다. 섭식장애가 있어 정상적인 식사는 커녕 만성변비에 시달리고, 씻지 않아서 더러운 반면 비정상적으로 외모에 집착한다. 모든 것을 혐오하고 망상,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가끔은 물건을 훔치는 등 사소한 비행도 서슴치 않는다. 특히 자신의 성적충동을 억압하면서도 소년원 경비원 랜디를 짝사랑하여 그가 자신을 주차장에서 덮치는 상상을 즐기며 그의 은밀한 부위를 관찰하고 집 근처에서 스토킹도 하는 등 음흉스럽기도 하다.

 

나는 이런 막강한 캐릭터를 어느 곳에서도 만나 본 기억이 없다. 소설 속 잊히지 않는 여성 캐릭터 몇 개를 꼽으라면 헨리 제임스 <워싱턴 스퀘어>의 고구마 100개 먹은 듯 답답한 캐서린(생각만해도 짜증이), <나를 찾아줘>의 희대의 악녀 에이미, <속죄>의 용서할 수 없는 브리오니 정도랄까...그런데 이들은 그저 경멸하고 욕하면 어느정도 해결이 되는데 아일린! 이 여자는 추하고 역겨우며 더럽고 찌질한데 무턱대고 비난할 수 없는 처연함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을 못받고 학대를 당했다고 해서 다 아일린처럼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드물겠지만 그 중엔 강하고 바르게 성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처를 받아 일그러졌다해도 아일린처럼 극단적으로 뒤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진실 앞에서 그녀를 비난할 수 없고 무엇보다 이런 그녀에게서 나를 발견했을 때 모든 것이 엉망인 삶도 공감과 연민을 자아낼 수 있음을 느꼈다. 

 

우리라고 항상 "노"라고 주변을 눈치보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물건을 훔침으로써, 남에게 나만 아는 소심한 복수를 함으로써 내안의 피해의식을 보상 받으려고 생각한 적 없는가? 나 혼자 있을 때 나 또한 얼마나 더럽고 냄새가 났던가...그 냄새를 숨기고 깨끗한 척 하지 않았던가? 끌리는 사람과의 성적인 환상 누구나 생각한다. 음흉스럽게 은밀한 곳을 보기도 한다. 나의 육체에 당당하고 정말로 건강한 성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만 그렇지 않은 척 적당히 감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런 차마 말할 수 없는, 발설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내면을 냉소적으로 드러내며 그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으로 망가진 한 여자를 통해 어떤 보편적인 진리를 보여준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아일린처럼 병들고 상처받으며 아프다. 아일린에게서 이런 나를 본 순간 이 책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이야기로 돌아가서, 자신의 암울한 현실로부터 늘 탈출하고 싶어하지만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던 아일린은 소년원 교육국장으로 새로 부임해 온 리베카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삶의 전환을 맞게 된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접근하는 리베카에게 자존감이 거의 없는 아일린은 우정을 넘어서는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게 되고 여기서부터 이야기에 가속이 붙으며 흥미진진하게 된다. 과연 아일린은 리베카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될까...? 이야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전개될거 같지 않은 묘한 기대와 함께...

 

결론을 말하자면 이미 앞에서 아일린 자신이 "이것은 내가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밝히기 때문에 결국엔 탈출에 성공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탈출로 모진 풍파를 겪기도 하지만 현재의 74세 노인인 아일린은 젊은 시절과는 달리 안정적이고 감정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차별과 학대를 받고 더 나아가 세상으로부터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한 사람이 뼈아픈 '삶의 진통'을 겪고 있는 진정한 자신을 만나고 그로인해 현실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난다는 진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아일린이라는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의 내면을 같이 좇아가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같이 성장해 가는 작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건 그 어떤 이도 아닌 나 자신임을 깨닫는 그 순간과 만나기 위해 아일린이 겪은 일주일 간의 이야기.

처음에 느꼈던 혐오감과 역겨움이 어느새 애처로움과 공감, 응원으로 이어지는 독서의 경험과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2018년 발표되 올해의 책으로 호평을 받은 두번 째 장편 <내 휴식과 이완의 해> 또한 번역되면 읽어 보고 싶다.

 

다음은 이 책의 첫 문장.

나는 당신이 시내버스 안에서 한 명쯤 볼 법한 아가씨처럼 생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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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5-07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두고서는
아예 찾으러도 가지 않았네요.

이러다 짤리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coolcat329 2019-05-07 18:30   좋아요 0 | URL
저도 가끔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
 
셰익스피어를 읽자 - 1,222명에서 찾은 인간관계의 비밀
한기정 지음 / 엑스북스(xbooks)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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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을 12개의 주제로 구분하여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 글로벌 IT기업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작가가 오직 셰익스피어 덕후로서 애정을 가지고 쓴 책인데, 영문학 전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셰익스피어에 대한 열정과 그 깊이에 놀라게 된다. 직접 옥스포드 판 원문을 번역, 거의 모든 작품 속 대사를 인용하여 대사가 품고 있는 '맛'과 뉘앙스를 느끼는데 도움을 준다.

 

목차는 다음과 같은데, 나의 경우엔 이 목차만으로도 안 읽을 수가 없었다.

 

1장 역설과 아이러니의 맛

2장 간신과 충신의 차이

3장 불안의 극복

4장 권력과 정치의 어려움

5장 사랑이란

6장 복수와 정의

7장 표절과 창의성 사이

8장 품위와 명예

9장 우정과 배신

10장 허풍 혹은 허세

11장 질투와 의심의 화학작용

12장 어리석음과 현명함 사이

 

'하느님 다음으로 많은 인물을 창조한 사람이 셰익스피어다'라고 제임스 조이스가 말했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수많은 인물들과 그 관계를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폭넓게 바라보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몇 백년이 흘러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이 시대를 초월하여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살아있기에 작가의 말대로 '삶의 지침서'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품위에 대한 인상적인 구절을 적어본다. 겸손하면서도 가식이 없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비극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오만에 빠진 인물이다. 이는 셰익스피어 작품뿐 아니라 실제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거짓이 없어야 하는 것 또한 중요한 조건이다. 셰익스피어가 설파했듯이 "거짓은 얼마나 근사한 외관을 갖는가?" 정치인은 거짓말을 자주 해야 하기 때문에 품위 있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늘 품위나 품격을 거론하는 사람도 이분들이다.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일반인과 같은 대우를 받으면 품격이 상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겸손하고 정직한 정치인, 그래서 저절로 품위가 따르는 정치인이 성공하는 나라를 원한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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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열린책들 세계문학 20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박우수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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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무서우며, 그런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야 정말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됨을 리어 왕과 글로스터 백작을 통해 강렬하게 보여주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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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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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야심찬 첫 출발, 셰익스피어! 

평론가 황광수가 셰익스피어 작품의 배경인 런던에서부터 중서부 유럽을 거쳐 이탈리아, 그리스에 이르는 지중해 지역까지 여행하면서 쓴 문학 에세이이다.

 

이 시리즈의 3권인 <클림트>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에 구입했는데, 기대만큼 잘 읽히지 않았고 가끔 철학적인 내용과 함께 분석해 놓은 부분은 이해하기가 힘들어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의 잘못만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부끄럽게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 한 권에 셰익스피어의 거의 모든 희곡을 다뤘는데, 단순히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무대가 되는 여행지를 찾아가 작품과 연관지어 작가의 생각을 담은 문학기행이기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그것도 몇 편 안됨) 알고 있는 나에겐 조금은 기운빠지는 독서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간 쯤에 책읽기를 중단하고 도서관에 가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리어 왕>,<맥베스>,<오셀로>를 빌려와서 <리어 왕>을 다 읽었는데, 의외로(!) 너무 재밌었고 내용을 알고 다시 이 책을 보니 작가의 글이 훨씬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너무나도 유명한 셰익스피어이지만 그의 희곡을 읽은 사람들은 의외로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같은 경우엔 현대 언어와는 다르게 화려한 비유와 수사가 많이 나오는 대사가 어색하고 이해하기 힘들어 선뜻 읽게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계기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정도는 꼭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이 책을 찾아 해당 부분을 읽어 본다면 더 좋을 듯 싶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을 맛보고 전체적인 흐름을 알게 되어 좋았다.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해 존재한 작가"

                                                     -벤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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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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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으로 접어들고 애인과의 일상은 권태로운 한 여자와 그 여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두 남자의 심리를 매우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그린 프랑수아즈 사강의 길지 않은 중편소설이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14살 연하남 시몽에게 이별을 고하는 폴이 슬픔에 뛰쳐나가는 시몽을 향해 마지막으로 한 말에 나 또한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지니 슬펐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인생 60부터!' 라고 말하지만 40만 넘어도 내 몸이 느끼는 노화의 징후들은 현재의 나를 제대로 바라보게 만든다.

 

사강은 노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 더 이상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는 때, 머릿속에서 분방한 생각들이 오가는 가운데 아침 추위로 이가 딱딱 부딪치는 때...지금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은 읽고 싶은 책들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뿐."

아직 노년이라고 하기엔 젊은 나이지만 이 말에 격하게 공감이 가는 건 설마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적어도 14살 연하의 잘생긴 시몽을 받아들일 수 없는 폴의 심정이 난 너무나 이해가 갔고 나 역시도 그 뜨거운 사랑에 몇 번 취할 수는 있겠지만 내 삶의 일부로 삼기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덧없음과 늙어가는 것에 저항할 수 없음을 알기에 분명 괴로운 갈등을 했을 것 같다.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사강은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 두죠." 라고 말했다고 한다.

로제와 폴이 처음에 만났을 때는 열정적인 사랑에 서로를 끊임없이 원했지만 그 열정이 식어버리자 로제는 자유분방한 자신의 본성을 감추지 못하게 되고 폴은 그런 상황에 점점 외로움과 권태를 느끼게 된다. 그런 폴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지만 14살이라는 나이 차이와 사랑의 유한함은 언제가 시몽도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불안감을 안겨준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충실하며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듦에 따라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서 모든것에서 안정을 추구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변화를 두려워 하게 된다. 폴도 마찬가지다.

 

p.141

"하지만 스무 살 때에는 지금과는 생각이 달랐어. 뚜렷하게 기억나. 나는 행복해지기로 결심했지."

그랬다. 그녀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욕망에 쫓겨 거리를, 해변을 쏘다녔다. 그녀는 하나의 얼굴, 하나의 생각을 찾아 헤맸다. 요컨대 하나의 대상을 찾아서. 3대에 걸쳐 여자들의 머리 위에 감돌았던, 행복해져야 한다는 의지가 그녀의 머리 위를 감돌고 있었다. 당시에도 장애물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제 그녀는 새로 개척하는 대신 갖고 있는 것을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직업을, 그리고 남자를......

 

한없이 사랑이 넘치는 시몽을 두고 무심하고 거기다 바람까지 피는 로제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던 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젊은 시절 추구했던 행복보다는 그동안 자신이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과 그 삶이 더 소중하고 그런 삶과 사랑을 끝까지 지키고 싶던 것이 아닐까...

어차피 사랑의 속성이란 유한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p.139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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