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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의 계절 ㅣ 암실문고
페르난다 멜초르 지음, 엄지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평점 :
<태풍의 계절>은 멕시코 작가, 페르난다 멜초르(Fernanda Melchor 1982 ~ )가 2017년에 발표, 2020년 맨부커 국제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작가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즈(Veracruz)에서 태어나 베라크루즈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저널리즘 기사와 소설을 쓰다가 작가가 되었다.
이 작품은 베라크루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마녀 살인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은 소설로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강에 죽은 이의 부패한 얼굴이 떠오르는 것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첫 페이지부터 음습한 기운을 강하게 퍼뜨린다.
소설은 마녀라 불리던 여인이 살해된 사건에서 시작한다. 마녀라고 불리지만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홀리거나 주술을 써서 사람들을 해치는 그런 마녀는 아니다. 그저 동네에서 따돌림 당하고 외롭게 사는 그러나 뭔가 알 수 없는 비밀에 둘러싸여 있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그런 존재일 따름이다.
이야기는 각 장(章) 마다 마녀 주변의 인물들이 한 명씩 등장하면서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에 독자만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정보가 부분적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독자도 정확한 사실을 알기는 쉽지 않다.
이 소설은 '누가 마녀를 죽였는가'의 문제보다는 마녀와 얽혀있는 주변 인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고 무지하며 몇몇은 폭력적인 데다가 늘 약에 취해있다. 성교육도 받지 못해 여자아이의 경우는 십 대 초반부터 임신과 출산에 노출되고 남자아이들은 그저 동물적 본능에 끌려다니는, 그야말로 삶의 희망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인생들이다. 가난과 무지는 이들의 마음 속에 분노의 씨앗을 심고, 그 분노는 삶에서 폭력으로 피어난다. 살인, 마약, 빈곤, 섹스, 강간, 동성애, 차별, 폭력, 빈곤, 증오, 문란함... 책을 읽다가 노트에 적어본 이 책의 키워드들이다.
NPR(National Public Radio)은 이 책을 두고 '어둠의 중심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곰팡이 같은 작품'이라고 평했는데, 이 평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장이 바뀔 때마다 곰팡이는 점점 퍼져나가고 마지막에는 곰팡이가 내뿜는 악취에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소설은 8장, 시체 안치소에서 시체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영혼을 달래는 노인의 이야기로 끝난다.
["아무 걱정 마시오. 겁낼 것도, 초조해 할 것도 없으니까, 거기 편안하게 누워 계시오. 이제는 비도 당신을 괴롭힐 수 없을 거고, 어둠도 영영 계속되지는 않을 거요. 보셨소? 저 멀리서 반짝이는 빛, 마치 별처럼 보이는 저 작은 빛 말이오. 여러분이 가야 할 곳은 바로 저기요. 저기가 바로 이 구덩이에서 빠져나가는 길이오." (p.356)]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죽어서나 만나는 '저 멀리서 반짝이는 빛'인 것일까?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위로의 말 같기도 한 이 마지막 문장은 소설의 가혹함에 지친 나에게도 위안으로 다가왔다.
참으로 충격적이면서 강렬한 소설이다. 나는 이런 책을 처음 읽는다.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도 매우 강렬한 소설이었으나 이 소설만큼 악취가 진동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렇게 느낀 이유는 아마도 이 소설이 진짜 리얼한 멕시코의 삶을 저널리즘의 문체로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용과 묘사가 너무 노골적이라 중간중간 눈살을 찌푸리게 되지만, 소설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좋았고 무엇보다 문장의 흡입력이 강해서 중간에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소설이 어느 정도 과장된 내용을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멕시코 베라크루즈에 살았던 한 독자는 리뷰에서 "나는 그곳에 살았었고, 이 소설에 묘사된 폭력은 전혀 과장돼 있지 않다."라고 말해 놀랐다. 또한 이 책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족장의 가을>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을유문화사의 '암실문고'는 세상의 어두운 이야기를 담는 시리즈인데, 암실문고 책은 처음 읽었지만 아마도 <태풍의 계절>이 가장 어두운 책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암실문고에서 나온 책들을 눈여겨 보니 작품 하나하나가 다 심상치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이번에 <코펜하겐 삼부작>도 구입했다. 더 사고 싶은 책들이 있지만 일단 참으려고 한다.
올 여름 정말 잊을 수 없는 독서를 했다.
한 무더기의 검은 뱀들 속에서 거무죽죽한 빛깔의 가면처럼 꿈틀거리는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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