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적 인간
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최용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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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여, 당신의 이처럼 겸허한 나체 그 밑바닥에

살포시 놓여 있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교만한 이국의 사람은

알 도리 없다, 이해할 도리 없다. 

                                          

-튜체프(1803~1873)


광활한 땅만큼이나 알 수 없는 나라 러시아. 

<러시아적 인간>은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들과 그들의 위대한 작품들을 분석하여 그 밑에 깔려있는 근본 정신, 즉 러시아적 정신을 찾는 책으로 1953년 처음 출간되었다. 


저자는 이즈쓰 도시히코(1914~1993)라는 일본의 언어학자이자 철학가, 번역가로 무려 30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언어 천재'라 불렸다고 한다. 철학, 문학, 언어학, 이슬람학, 힌두교, 불교, 노장사상, 주자학 등 여러 분야에서 강의 및 저술활동을 한 세계적인 석학으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코란> 원전을 완역해 출간했다. 


이 책은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부터 4장은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정신을 총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러시아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5장부터 14장까지는 푸시킨에서 시작하여 체호프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러시아의 어떤 정신이 이들 작가들을 움직였는지 설명한다.


러시아 정신의 뿌리 깊은 곳에는 13~15세기에 걸친 타타르인의 지배가 자리잡고 있다. 타타르인의 침공은 러시아인을 하루아침에 노예 신세로 만들었다. 바로 이 3세기에 걸친 굴욕과 고난이 러시아인의 정신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러시아 민족은 스스로를 '박해받는 자'로 규정하였고, 타타르인의 지배를 받은 300년이라는 시간은 러시아 민족으로 하여금 반역 정신과 묵시록적 관점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간 그리스도는 이런 러시아 민족에게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그리스도가 사흘 뒤 부활했다는 사실은 언젠가는 자신들의 삶도 희망으로 밝게 빛날 것이라는 믿음이자 약속이었다. 러시아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광기에 가까워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듯이 '무신론자는 러시아인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정신 세계에서 러시아의 기독교는 러시아만의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었고 '러시아가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확신'(p.65)으로 까지 확대된다. 


이반 3세 시대 드디어 타타르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러시아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인 모스크바 공국으로 새롭게 탄생하는데, 교회와 은밀히 결탁한 차르의 독재에 러시아 민중은 또 다른 형태의 노예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박해받는 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묵시록적 환상, 러시아 민족이 전 세계를 구원한다는 망상이 이 시기에 생겨난다. 


[러시아인이 스스로를 '최고의 진리'를 받드는 지상 유일의 민족이라 믿고 언제가 러시아를 중심으로 세계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독특한 사상(이라기보다 환상)을 갖게 된 것은 타타르 시대 이후인 모스크바 시대의 일이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세계 구원이라는 메시아 사상에 대한 이해는 러시아 문학뿐 아니라 러시아의 일반적인 현상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p.68)]



이로써 타타르 시대 이후 러시아인들은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종말론적, 묵시록적 관점을 지니게 되었고, 러시아만이 전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정신이 러시아인들의 영혼에 뿌리 깊게 자리 잡는다. 드디어 하나가 된 러시아는 강력한 신권정치를 바탕으로 자신을 세계 역사의 주인으로 인식하는데, 이러한 인식은 오랜 세월 이민족의 폭정으로 고통당한 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와 묵시록적 정신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된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붕괴되자 러시아는 지상에 남은 유일한 그리스 정교 국가가 되었고, 러시아가 세계의 중심이며 구원자라는 믿음은 더욱 확고해져 스스로를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모스크바 정신은 모스크바 공국이 멸망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데, 이는 표트르 대제가 가진 사명, 즉 러시아주의가 곧 세계주의라는 사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훗날 이 정신은 러시아 혁명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상이 푸시킨 이전의 대략적인 러시아 정신사(史)로 저자는 이러한 러시아 정신을 알아야 러시아와 러시아 문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독후감은 '아 이런 책이 있구나' 정도로 아시고,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시는 분들, 특히 러시아 문학에 나오는 심각하고 묵시록적인 인간들을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슈테판 츠바이크였다. 순간순간 츠바이크의 글을 읽는 듯한 친숙함이 느껴져 얼굴도 모르는 저자이지만(나중에 찾아봐서 지금은 안다) '30개 언어를 구사하는 대단한 학자가 참으로 러시아 문학을 사랑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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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1-17 1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앙 이거 읽으셨군요! 전 이거 아직도 읽는 중인데 ㅋㅋㅋㅋ 진도가 이상하게 안 나가고 있어요(벨린스키 읽을 차례입니다). 얼른 읽어야지…..

coolcat329 2024-01-17 08:37   좋아요 2 | URL
오! 이 책 읽고 계시는 군요. <모비딕> 읽으시느라 진도 못 나가신 거 아닌가요? 잠자냥님 리뷰 기다릴게요.😉

레삭매냐 2024-01-18 16: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러시아가 제 3의 로마제국이라 -

무신론자는 러시아인이 될 수 없다
는 선언이, 최초의 소비에트 국가
였던 러시아에서 나왔다는 말이 참
역설적으로 들리네요.

제가 러시아 문학에 빠지지 못하
는 이유 중의 하나가 어쩌면 이런
러시아 정신을 이해하지 못해서
가 아닐까 추론해 보게 되네요.

coolcat329 2024-01-18 22:19   좋아요 0 | URL
책에 ˝러시아 혁명은 이미 무의식적인 종교˝라는 말이 나와요. 러시아 혁명도 교회처럼 전 인류 구원의 메세지를 담은 일종의 무의식적 종교였다는 거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라는 외침이 무슨 종교 집회에서 나올 법한 말로도 들려요.